죽음이 먼저 말을 걸어왔던 소년, 항해사가 되다
"나를 지켜낸 것은 타인의 위로가 아니라, 내 손으로 꽉 조여 맨 운동화 끈이었다."
내게 여행은 단순히 국경을 넘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 겹겹이 쌓인 방어기제를 걷어내고, 깊숙이 숨어 있던 ‘진짜 나’를 찾아가는 처절한 발굴의 시간이었다.
그 발굴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아주 작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태어나자마자 삶보다 죽음의 서늘한 숨결을 먼저 배웠다. 희게 질린 병실의 천장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 소년에게 창밖의 세상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하고 위험한 괴물이었다. 삶보다 죽음이 먼저 말을 걸어왔기에, 소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제자리에 멈춰 소멸하기를 거부했다.
위태로운 생명력에 스스로 숨을 불어넣기 위해, 소년은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매고 밖으로 나갔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몸이 땀으로 무겁게 젖어들 때마다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뜨겁게 달궈진 근육 위로 마음의 요동은 잦아들었고, 소란스러웠던 감정들은 차갑게 식은 이성 뒤로 자취를 감췄다. 어떤 풍파가 닥쳐도 무너지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이 그 굳은살 박인 자리마다 차곡차곡 들어앉았다.
여행은 그렇게 스스로 제련한 나를 시험하는 거대한 무대였다. 낯선 길 위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와 마주할 때마다, 내 안의 소년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머리로 상황을 분석하며 누구보다 침착하게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때로는 낯선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선택적 외향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유연하게 몸을 틀 줄도 알게 되었다.
만약 길 위에서 과거의 그 어린 소년을 우연히 마주친다면, 나는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해주고 싶다. 세상을 너무 무서워하며 움츠러들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보라고.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보라고. 그러면 네가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눈부신 세상이 너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 거울 속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던 작은 생명체가 없다. 삶이 던진 거친 파도를 타고 넘으며 스스로를 빚어낸 강인한 항해사가, 이제야 비로소 온화한 미소를 띠고 서 있을 뿐이다.
여행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장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을 깨워주었다.
스스로 생명력을 불어넣어 살아남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이 단단한 평온을, 나는 이제 진심으로 사랑한다.
다음 이야기 : Ep.4 나를 빚는 또 하나의 길 - 단단하게 묶인 운명이라는 이름의 매듭.
먼지가 꽃가루로 변하는 시간. 그 순간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에 배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