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존중이 갇힌 감옥

내 기준이라는 창살을 부수다

by 테오 진

"진정한 존중은 혀끝에서 굴리는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내 앞의 존재가 누구든 그가 품은 진심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된다."




멕시코의 어느 해 질 녘, 광장에는 마리아치들의 경쾌한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노인부터 갓 걸음마를 뗀 아이까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는 낯선 풍경. 아르헨티나의 매서운 돌풍을 뚫고 온 나에게, 갓 구운 타코 알 빠스또르의 매콤함과 꿰사디아 속 와하까 치즈의 고소함은 낯설고도 포근한 위로였다. 나는 광장에 서서 쫀득하게 늘어지는 치즈를 즐기며, 이 평화로운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시선을 단번에 낚아챈 장면이 있었다. 열 살 남짓 되었을까, 자그마한 아이 하나가 서른 중반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어른 앞에 당당히 서서 아주 단호하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내 안의 유교적 본능이 사납게 꿈틀거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저 무례한 상황은 대체 뭐지?' 싶어 본능적으로 주변 어른들의 시선과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광장의 누구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인 듯했다.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나이는 곧 계급이었고, 예의는 침묵과 순응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어른의 말에 토를 다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내 세계관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오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를 진짜 충격에 빠뜨린 건 그 지적을 대하는 어른의 자세였다. 꼿꼿이 서 있던 나의 시선 끝에서, 그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아주 해맑게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아이와 정확히 눈높이를 맞춘 채 "아, 네 말이 맞네! 미안해, 아미고."라며 아이의 조언을 넙죽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아이 역시 그를 향해 스스럼없이 "아미고!"라 부르며 화답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내가 평생 정답이라 믿어온 '존중'의 정의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호기심과 당혹감이 뒤섞인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아이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사내는 시원한 맥주를 건네 병을 부딪치며 웃으며 답했다. "내 잘못을 이야기해 주는 고마운 내 아미고니까."


함께 땀 흘리며 춤을 추고 서로를 뜨겁게 안아주는 사이, 그 투명한 대답 앞에 내 안의 견고했던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의 평등한 관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진리는 결코 나이의 순서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것이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침묵, 존대, 경어'는 산소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공기가 때로는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왜 몰랐을까. 나이라는 숫자가 완장이 되고, 언어의 격식이 사고의 격식을 가두는 감옥이 될 때, 우리는 '배움'이라는 보물을 스스로 발로 차버리고 만다.


타인을 존중하기 위해 태어났을 우리네 높임말이, 역설적으로 타인을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 것은 아닐까. 언어가 계급이 되고 서열이 되는 순간, 진정한 대화는 증발하고 훈계와 복종의 찌꺼기만 남을 뿐이다. 지구의 긴 시간을 놓고 본다면 열 살이나 백 살이나 결국 이 찰나를 함께 스쳐 가는 동행일 뿐이다.


나는 이제 내 안의 견고한 창살 하나를 부수고, 비로소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멕시코의 해 질 녘 광장은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존중이란 상대를 높이거나 낮춤으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나를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 두는 용기라고.


나는 마리아치의 선율에 맞춰 함께 춤을 추고, 서로를 뜨겁게 안아주는 이들의 따스한 인사를,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수평적인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득 나에게 묻는다.


나는 오늘 나보다 작은 존재 앞에서 기꺼이 무릎을 굽히고 따스하게 안아주며, 그의 목소리를 나의 '아미고'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다음 이야기 : Ep.10 나에게도 웃는 얼굴이 있었다 – 낯선 이들이 비춰준 나의 주권.


먼지가 꽃가루로 변하는 시간. 그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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