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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그리고 아무르

by 김몽실

드라마를 보며 나는 너무도 ‘은중’과 같은 사람이지만 때론 ‘상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은중처럼 사랑을 받을 줄도, 줄 줄도 알지만 상연처럼 못나게 굴며 사랑을 주고받는 일조차 거부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상연은 삐뚤어진 은중, 삐뚤어진 우리 모두였다.

기억에 남는 상연의 대사가 있었다.

”아이가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그렇게 돼 버리는 거야. “

상연은 그저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작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어린 상연에게 누군가 ‘너 잘못이 아니야. 많이 힘들었지’라는 말 한마디만 건넸더라면, 본인을 내던져가며 그렇게 살진 않았을거라 생각했다.

나는 때로 은중 같기도, 상연 같기도 하면서 드라마에 푹 빠졌고 상연이 떠나는 며칠을 담은 마지막 화를 보면서는 펑펑 울며, <아무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나한테 가장 무서운 영화이다. 단란하게 살던 노부부의 이야기인데 갑작스레 아픈 아내를 남편이

간병하기 시작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더 나아질 수도 없는 현실에 남편은 아내의 고통을 끝내기 위한 죽음을 선택한다.

늙고 지친 노부부가 겪는 무력감이 피부로 느껴졌고 하루하루 나빠질 일만 남았지만, 언제 죽을지 끝은 모르는 현실이 무서웠다.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지만 실제 많은 노인들이 겪는 문제일 거고 집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늙고 아프다는 게 현실에서 가장 무력한 공포가 같았다.

<아무르> 와 <은중과 상연> 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과도한 감정 연출이나 배경음 없이 제3자가 그저 묵묵히 관찰하고 있는 듯 연출했다. 그게 무력감을 더 극대화하고 죽음을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일상에서 죽음으로, 한순간에 다른 차원으로 변해버리면서 다시는 서로 만질 수도 대화할 수도 없게 돼버리는.

​​

‘개가 시간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일 것이다.’

죽음이 뭘까. 사람은 왜 죽을까. 평생 죽음이 낯설게만 느껴질 것 같을 때, 위로가 되었던 말이다.

<은중과 상연> 은 잔인하지만 어떻게 보면 최선의 죽음이었다. 마지막에는 상연이 은중과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다른 차원으로 가서 사랑 받고, 사랑 주며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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