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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Aug 20. 2020

카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

신부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서 다가오길 바라던 시간의 절정에 닿았다.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문이 서서히 닫혔고 그 속도만큼 사위가 고요해졌다. 북적였던 이 공간에는 단 두 사람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차림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문을 나섰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꿈같은 착각 속에 어디론가 이끌려 도착하니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한 손으로는 꽃과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고, 다른 손은 아빠 손을 잡고 우리를 기다리는 곳에 잠시 멈춰 섰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곧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곱게 단장하신 어머니들이 입장하시고 초에 불이 켜졌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니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지인들이 손을 흔들며 덕담을 하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먼저 나아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하는데 어느새 약속한 장소에 이르렀다.



내 차례다. 잡고 있던 아빠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예행연습도 없는 이 걸음을 위해 우리는 마음을 모았다. 천천히 걷자고 아빠와 눈으로 약속하고 한 걸음씩 내디뎌 보았다.




스물한 살 12월,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나는 전화 한 통을 받고 무작정 병원으로 달려갔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던 아빠는 나를 못 알아보셨다. 그날 처음으로 엄마의 눈물을 바라봤다. 그 밤 처음으로 병원 복도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며칠을 중환자실 앞에서 서성이며 면회 시간만 기다렸다.


온갖 가능성을 염두에 둔 지옥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면회 도중 아빠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잡으셨다. 일반 병실로 옮겨도 된다는 말에 우리 가족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외딴 건물 보호자 대기실에서 모르는 이들과 잠을 자도, 어쩌면 학업을 멈춰야 할지 몰라도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아빠가 보여준 희망으로, 그것 하나만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빛을 배경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방향으로 박수와 함성이 음악과 섞이는 일생일대의 순간을 아빠와 함께 걸었다. 이 걸음은 병원 시절, 아빠가 나에게 꼭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한 길이었다. 그 짧은 거리가 삶에서 가장 또렷한 시간으로 변하며 순간, 세상이 멈춰진 것 같았다. 나를 마중 나온 구두코가 보여 고개를 들어보니 아빠와 그가 포옹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고 아빠는 엄마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해 연말, 아빠가 퇴원하셔서 우리 가족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몫을 다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에게는 어렵게 이어진 학업이 가장 중요했다. 오늘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아르바이트할 수 있어서 하루를 감사로 열었다. 졸업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한 취업준비생 시절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가족이 있다는 이유는 매일 나를 일으키는 희망이 되었다.



긴 밤이 지나면 언제나 아침이 찾아왔다. 매일 내게 주어지는 하루라는 시간이 유독 빛났다. 인생으로 펼쳐보면, 힘든 시기가 지나면 반드시 빛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치는 낮이 지나면 다시 어둠이 시작된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언젠가는 맞이할 끝이 존재한다. 유한한 시간의 마지막을 기억한다면, 매일 하루를 감사로 시작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Gira, il mondo gira nello spazio senza fine

세상은 끝없는 시간 속을 돌고 있어요

Il mondo non si é fermato mai un momento

이 세상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죠   



그날을 위해 준비한 노래, ‘IL MONDO’의 가사처럼 우리는 끝없는 시간 속을 도는 세상의 중심을 걸었다. 아빠와 함께 걷는 그 순간은 멈추고 싶을 정도로 찬란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예외 없이 덤덤하게 흘렀다. 혼인의 예를 마치고 축복의 행진을 하니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걸으며 다짐했다. 이 길에 꽃만 피지 않더라도 행복의 공식을 잊지 말자는 것을.


Memento mori!

Carpe diem!


https://www.youtube.com/watch?v=CAlJVvWpnyk

'IL MONDO(세상)’ by.미라클라스 (원곡 Jimmy Font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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