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덮을 때마다 작가를 향한 경외감이 생겼다. 글쓰기는 실로 대단한 일이며 특정 인물에게 주어진 고유 영역이라 여겼다. 이런 이유로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지식의 밑천이 탄로 날까 봐, 글솜씨가 변변치 않으니까, 글 자체가 나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늘 감췄다. 이따금 홀로 글을 썼으나 이는 오직 나만의 영역, 그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글을 공개하기 싫었던 이유는 학창시절 과제로써 평가되면서부터였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는 내 생각에 왜 점수를 매기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학년이 오를수록 수행평가라는 명목으로, 대학 입시를 위한 관문으로 '논술'이라는, 이름 자체도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서 내 삶에 글쓰기는 따로 떼어두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건지, 알아야 할 건 많은 것인지 성장기에 정신적 부담만 늘었던 것 같다. 글이 싫었던 절정기는 20대 중반이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논술을 또 만나고야 말았다. 도대체 왜, 내 인생에 자꾸 출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해야만 하니까 억지로 할 수밖에 없던 것이 글쓰기였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목적을 모르는 글쓰기는 쓰기 자체에도 거부감을 주고 공개하기도 싫을 수밖에 없다. 그때 내 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하지만 그 시절 내면에는 글을 향한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입시와 취업의 수단이 아닌 순수히 내 기억을 기록하고 싶은 본성이 그 마음이다. 타의였지만 열 살 때부터 쓴 일기는 자의가 되어 지금껏 이어왔다. 중간에 끊겨도 다시 일기를 이었다. 노트의 줄 간격이 좁아지고, 미니홈피가 등장하고,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글바닥이 달라져도 내 마음을 적었다. 비록 자물쇠로 꽁꽁 잠갔지만. 덕분에 중학생 시절에는 글짓기 대회에도 나가고 신문 편집부 활동을 하면서 아주 조금씩 글의 영역을 넓혀보았다. 이마저도 고등학생 때는 입시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거둬들였다. 전공 시험으로 약술과 서술을 숱하게 하면서 글쓰기란 이렇게 재미없는 일임을 확고히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매일 보고서를 쓰면서 다짐했다. '내 인생에 글쓰기란 없다.'
글쓰기의 진가를 모른 채 살았던 시절이다. 글을 쓰다 보니 글이란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내면의 대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즉,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영역이다. 이를 모르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강제 독후감, 강제 글짓기로 임하니 글이 싫어질 수밖에 없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글쓰기를 증오했지만, 내 안에는 글에 대한 애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몸이 힘들 때, 마음이 울적할 때 나를 실현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잊고 살던 글을 쓰면 되겠다는 직감이 다가왔다. 이를 실행해보니 글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글을 쓰면 스스로 치유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글을 쓸수록 공개하기 부끄러웠던 어린 마음은 점차 옅어졌다.
지금 나에게 글쓰기란 용기다. 내 글은 나를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고 싶다. 타인을 위한 희망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던 시절, 내면의 방황을 할 때 글을 읽으며 받은 감동이 글을 쓰겠다는 목표로 이어졌다. 내가 받은 희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온 작가들의 용기일 테니까, 나 역시 용기로써 글을 쓰며 글이라는 고귀한 강을 영원히 흐르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