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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Apr 05. 2020

엄마가 손빨래를 하는 이유

너를 사랑하는 시간

우리 집 세탁실 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이 더미는 세탁기가 아닌 내 손을 기다리는 빨랫감이다. 가끔 등장하는 가족들의 소중한 옷이나 특히 아기 옷, 속옷이 주요 구성원이다. 살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반드시 내 손으로 빨아주고 싶은 이유가 있다.



불현듯 빨래가 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때가 됐다 싶으면 세탁실에 있는 손빨래 거리를 확인하고 욕실로 모아 본다. 오늘은 아기 빨래가 쌓여 있다. 아기 세제와 섬유유연제도 가져오고 커다란 대야를 몇 개 준비한다. 수도꼭지 앞에 대야를 놓고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는다. 물을 틀어 대야를 한번 씻고 미지근한 물로 바꿔 세제를 골고루 풀어본다. 기다리고 있던 빨랫감을 하나씩 넣는다. 거품이 부글부글 피어오르고 내가 좋아하는 빨래 향이 서서히 올라온다.



아기 속옷부터 하나씩 빤다. 너무 작아서 내 한 손에도 다 들어오는 이 인형 옷 같은 것을 몇 번 조심스럽게 ‘죔죔’ 해본다. 곧이어 아기가 좋아하는 잠옷이 나온다. 매일 입어도 질리지 않는 이 옷을 조물조물하다 보면 굳은 밥알이 튀어나온다. 어떤 날은 미처 보지 못한 얼룩이 눈에 띈다. 남기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신경을 써본다. 세제를 더 묻혀보고 안 되면 다른 세제의 도움을 받아 얼룩을 지워버리고 만다. 뒤이어 내가 좋아하는 아기 옷이 나온다. 뭘 했다고 무릎이 툭 튀어나온 하늘색 칠부바지는 보고만 있어도 귀엽다. 이 옷도 참 컸었는데 어느새 딱 맞는 모습에 기특하기도, 아쉽기도 하며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씩 빨래를 하며 씻기는 얼룩을 보니 내 마음도 상쾌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아까 놀자고 했는데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오늘 화내서 미안해. 그냥 미안해. 빨래 끝나면 웃는 모습으로 같이 놀아야지.



어느새 거품이 잔뜩 묻은 아기 옷이 쌓여있다. 헹궈야 할 시간이다. 떼 묻은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받는다. 욕실에 가득 찬 거품 물을 보니 쪼그리고 앉아서 엄마 뒷모습을 바라보던 때가 떠오른다. 엄마가 빨래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게 좋았다. 누렇거나 파랬던 빨랫비누, 일정한 간격의 주름이 많았던 빨래판, 가끔 행주 삶는 기구로 쓰셨던 스테인리스 빨랫대야까지. 세탁을 위한 도구 여럿을 이리저리 바꾸며 엄마는 꽤 오랫동안 손빨래를 하셨다. 손으로 주무르는 소리, 물을 버릴 때 대야와 욕실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 새 물이 차오르는 소리. 어느새 욕실에 가득 찬 빨래 향을 맡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며 빨래하셨을까, 혹시 나처럼 엄마 생각을 하셨을까.



산뜻하고 깨끗한 빨래 향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그 향을 맡으며 거품이 나오지 않도록 몇 번이나 물로 헹군다. 동시에 오늘 나와 함께한 투정도 함께 내보낸다. 빨래도 내 마음도 깨끗해져라. 깐깐한 나의 점검을 마치고 섬유유연제로 사랑스러운 향을 더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너의 향기를 맡으면 어지럽도록 행복한 느낌을 누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탁기에 넣어 물기를 꼭 짠다. 세탁기의 선율이 끝나면 완성된 빨래를 한 아름 안아서 옮긴다. 볕이 잘 드는 거실에 건조대를 펼쳐놓고 빨래를 팡팡 털어 하나씩 걸어 놓는다.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으로 어여쁘게 마르기를.



거실을 채운 빨래 모습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차오른다. 이따금 바람이 살랑 불면 잔잔한 파도처럼 흐르는 옷가지의 움직임이 어쩐지 더 예뻐 보여 행복이 피어오른다. 그 바람은 빨래 향을 머금고 집안 곳곳에 닿아 있다. 내 사랑이 온 집안에 가득 차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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