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오늘과 나의 옛날을 잇다
우리들 대부분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온 시간 여행자다. 디즈니 주인공들을 비디오테이프에서 4D로 만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IT 강국에서 사는 덕분에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감탄하지만, 이런 흐름에서도 절대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아이들 마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 있을 것이다. 오늘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존재들, 슈퍼 아이스크림을 아이의 마음으로 꺼내 보고 싶다. 아기와 함께 집 앞 슈퍼에 가는 길 유난히 아기의 발걸음이 가볍다. 장난감 장바구니를 손에 쥐고 오늘은 뭘 먹을 거라며 쉴 새 없이 쫑알쫑알 재잘재잘하다 보면 어느새 도착했다.
문을 옆으로 여는 커다란 냉동고 앞에 까치발을 하고 서 있다. 순간 가장 진지한 상태가 되어 원래 좋아하던 것과 새롭게 시도할 것을 적절히 섞어 선택한다. 움직이지 않는 계산대에 올려놓고 아주머니의 상냥한 웃음과 말씀으로 아이스크림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움직인다. 엄마가 카드를 내고 다시 받으면 이 아이스크림의 주인은 아기가 된다. 다시 집으로 가는 길, 걸음을 재촉해본다. 엘리베이터는 더디게 오는 느낌일 것이다. 열쇠를 꺼내는 엄마를 기다리며 장바구니 속 아이스크림이 잘 있는지 확인한다.
겨우 기다렸다. 엄마가 손 씻고 옷 갈아입어야 한다고 하셨다. 알았다고 하면서 가장 먹고 싶은 거 하나만 먼저 만져봤다. ‘안 녹았구나. 다행이다.’ 드디어 마주한 오늘의 아이스크림. 메로나다. 엄마가 좋아하는 연두색 아이스크림은 한 입 먹었을 때 스치는 향기가 참 좋다. 생각보다 보드라운 감촉은 먹기도 편했다. 막대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애가 탄다. 메로나는 하나만 샀는데, 또 먹고 싶어 지면 어쩌나. 내가 좋아하는 구석에 앉아 메로나 한입을 먹을 때마다 행복과 아쉬움이 같이 느껴지는 마음을 자유롭게 누려본다. 또 먹고 싶다. 지금은 안 되니까 저녁에 아빠가 오시면 시도해야겠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빠가 오셨다. 아빠랑 조금 놀다 보니 저녁 식탁이 완성되었다. 밥 잘 먹어야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으니 더 씩씩하게 먹었다. 예상대로 엄마가 아빠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하신다. 냉장고로 뛰어가서 아까부터 먹고 싶었던 더블 비얀코를 고르고 아빠께 찰떡아이스를 가져다 드렸다. 오늘 달이 유난히 컸다. 엄마는 저기 저 달나라에 토끼가 찰떡아이스를 만들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열심히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더블비얀코가 너무 맛있다. 정확히는 손잡이에 있는 사과 맛 하얀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기다렸다. 엄마에게 어서 숟가락을 달라고 해서 열심히 파먹었다. 오늘 두 번째로 행복한 순간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꼬마를 보니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도 좋을까 싶지만, 그렇게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엄마에게 받은 천 원짜리를 주머니에 넣고 동생과 함께 슈퍼로 달려갔다. 미션은 아이스크림 3개 사 오기. 위로 문을 여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도착하면 10분 정도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막대 아이스크림은 300원 정도라 3개 살 수 있었는데, 찰떡아이스와 더블비얀코, 빵빠레는 500원이라 예산 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죠스바, 메로나, 수박바를 선택하고 거스름돈 100원은 천하장사 소시지와 바꿔 잔돈을 없앴다.
그 200원 차이가 막대 아이스크림과 고급 아이스크림을 나누는 기준이었던 것 같다. 늘 먹고 싶었던 빵빠레와 친구들은 어쩌다가 한 번씩 먹어서 더 소중했다. 학년이 올라가며 용돈도 올랐지만 아이스크림 값도 같이 올랐다. 인플레이션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 반값 아이스크림 가게를 알기 전까지는 고급 아이스크림을 먹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에서 만난 그 옛날을 간직한 아이스크림이 참 반가웠다. 이름만 알았지 먹어보지 못한 아이스크림을 쓸어 담아 냉장고 가득 채워보았다. 이렇게 우리 아이도 변치 않는 슈퍼 아이스크림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너의 두 눈과 나의 두 눈은 닮았다. 입맛도 닮았다. 30년의 세월을 초월한 슈퍼라는 장소에서 맛도 모양도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아이스크림을 직접 골랐다. 옛날에는 조금 담았고 지금은 먹고 싶은 만큼 담는 것이 다르다. 집에 와서 오늘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분을 달래 본다. 아까 혼나고 혼내며 불났던 마음이 시원한 달콤함으로 사르르 녹는다. 오늘도 이만큼 자랐다. 아이스크림 먹었다고 티를 내고 있는 얼굴을 닦고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과일 그림을 그려보았다. 먼저 색연필로 커다란 수박 하나, 잘라서 또 하나, 또 자르다 보니 어느덧 내가 좋아하던 수박바가 완성됐다. 물감과 붓을 준비했다. 파레트에 색을 준비하고 함께 붓을 들었다. 빨간 과육과 초록 껍질로 색칠하는데, 옆에서 갑자기 거친 붓질이 스쳤다. 금세 초록으로 뒤덮은 내가 바라 온 초록 수박바.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인다. 초록 부분만 먹고 싶던 내 어릴 적 꿈을 우리 꼬마의 힘 있는 손길로 이루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