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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Apr 09. 2020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저기요, 청춘도 생각을 합니다

미치도록 소득세를 내고 싶었던 취준생을 졸업했다. 꿈같은 입사 합격 통보를 받고 일주일간 구름 위에서 살았다. 1월 어느 월요일. 정식 사원으로서 정장을 입고 첫 출근을 했다.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이 한 몸 바쳐 열심히 일하겠다는 다짐으로 입사식을 마치고 바로 합숙 연수에 돌입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동기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양한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 만났지만 입사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인연의 끈이 단단해졌다. 연수원에서 지내며 아직 일하지도 않았는데 월급날이 되니 통장에 유동성이 공급됐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소득세도 빠져나갔다. 감개무량한 순간. 세상이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이렇게 한 달가량 신입사원 교육을 받으며 동기들과 전우애가 다져지는 꿀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합숙 연수를 마치고도 사내 교육이 이어졌다. 우리끼리 점심을 먹은 후 같은 사원증을 걸고 다니는 분들을 보면 괜히 반가웠다. 그분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멋진 차림으로 산책을 하거나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 모습에 동경이 생겨서 어서 부서 배치를 받아 점심시간의 여유를 마음껏 뽐내는 날이 오길 꿈꿨다. 인생은 착각의 연속인 걸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모순적이게도 점심시간이 가장 싫어졌다.



꿈에 그리던 일에 막상 투입되니 새로운 일도 어려웠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더 어려웠다. 직장 상사들을 실제로 마주하니 직함과 성함, 얼굴까지 매치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점심시간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나에게만 쏟아지는 질문과 어색한 대답에 밥이 목으로 안 넘어갔고, 주로 함께 식사하는 분들이 개인 약속으로 이리저리 흩어지면 점심 먹을 사람을 찾기 바빴다. 차라리 공식 모임을 기다렸다. 신입사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여기저기서 불려 다니며 점심을 함께했던, 동기들과 함께 먹은 점심밥이 그리워졌다. 이렇게 점심마다 눈치 게임이 이어졌다.



처음 맛보는 직장인의 점심 세계도 어색했다. 한식 파였던 나는 어느 날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자는 제안에 얼떨떨했다. 내게 샌드위치는 간식에 불과했는데 선배들은 샌드위치와 커피 점심 메뉴가 꽤 익숙해 보였다. 이 점심을 먹으며 어제 나온 드라마 얘기, 개인적인 얘기, 회사 얘기 등 다양한 주제가 사이드 메뉴처럼 곁들여졌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서 샌드위치에만 집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빵과 풀떼기가 식사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선배들은 휴게실에서 잠을 청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못 마친 일을 했는데, 그날은 저녁이 되기 전부터 출출해졌다. 알 수 없었다. 왜 점심시간에 간식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인지.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후배가 생겼다. 그리고 친한 동료가 생겨서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마음이 잘 맞아서 둘이서 근처 맛집을 탐방하기도 하고, 한동안은 도시락을 싸서 휴게실에서 먹기도 했다. 그 시간이 어찌나 즐겁던지 신입 때 생겼던 위장병도 사라졌었다. 가끔 팀이나 부서 차원의 식사도 여유롭게 참여하면서 몇 년이 지나서야 점심시간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 때때로 퇴사 충동이 생길 때는 친한 동기에게 SOS를 쳤다. 그날은 저 멀리, 회사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서 은밀하게 점심을 먹고 속마음을 터놓는 시간이었다. 그때만큼은 회사원이 아니고 싶었다. 일, 민원, 고과, 발령 이런 고민을 점심시간에는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돌이켜보니 인사발령이 날 때마다 점심을 어떻게, 누구와 먹어야 하는지는 큰 고민이었던 것 같다. 매일 밥 동무가 있고 어쩌다가 꾸역꾸역 찾기도 했지만, 한 번씩은 정말 나 홀로 남겨진 적도 있었다. 최후의 보루 동기들도 제각각 약속이 있으면 답이 없었다. 더는 생각도, 용기도 없어서 그냥 점심을 포기했다. 마침 밥맛도 없어져서 그럴 때는 내가 좋아하던 장소에 다녀왔다. 택시를 타고 갈 수 있던 광화문. 그곳에 도착해 바람을 쐬고 글판을 보고, 서점에 들러 아무 책이나 사서 커피 한잔 마시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돌아왔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냥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누려보고 싶었다. 지금껏 혼자라는 시선이 두려웠는데, 드디어 혼자가 어색하지 않게 된 계기였다.



내가 웃음을 잃은 직장인이 되어보니 신입사원 때 동경한 직장인들은 그 시간이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 같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얼마나 많은 압박과 시달림으로 오전을 보내다가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한 시간의 여유를 갖는 것이었을까. 그 속도 모르고 사원증과 들고 다니는 커피에 눈이 멀어 핑크빛 회사생활을 꿈꿨던 스물여섯 살의 나에게 너무 호들갑 떨 필요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점차 후배의 자리를 물려줬을 때, 모든 게 새롭고 어색했을 신입사원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먼저 청했으면 어땠을까.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결코 휴식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가 힘들었을 회사 생활에 점심시간만큼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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