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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n 30. 2020

회사 비밀 커플의 냉정과 열정 사이

당신에게 보여주지 못한 내 마음

절친한 친구가 입이 근질거려 참기 힘들다고 말을 건넸다. 급기야 친구 회사에 있는 비밀 커플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느냐고 내 호기심을 건드렸다. 오래전부터 본인 눈에만 띄어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란 적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맞닥뜨리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며 운을 뗐다. 그 커플로 말할 것 같으면 여자가 막 입사해서 남자가 있던 팀에 발령 났는데, 처음부터 청춘 둘이 예사롭지 않았단다. 같은 팀이라는 이유로 자꾸 저녁을 먹으러 나가고 별 필요도 없는 야근을 해대며 워커홀릭이라는 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더듬거리며 이어갔단다. 한 편에서는 뭐, 패기 넘치는 신입이거늘 남자 대리도 일복이 워낙 많았으니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친구는 아마도 그 둘이 봄바람을 타고 썸도 타기 시작한 것 같다고 탐정의 눈빛을 발사했다.



꽃샘추위가 있던 3월, 친구는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신촌의 한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곳을 자주 쳐다보다가 갑자기 그 둘을 목격한 것이다. 그냥 아는 사람들이네, 하면서 둘의 관계를 의심도 못 하는 찰나 그들은 사라졌다. 그때부터 이 친구의 레이더에 들어오기 시작한 걸까. 여느 출근길, 회사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그 시간 빌딩 숲에 어울리지 않는 대화에 고개를 돌리니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달달하게 떠들고 있었다. 한여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왕복 10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애정행각을 하니 누가 모를까 싶지만, 애써 고개를 돌려줬다고. 꽉 잡은 두 손을 요란하게 풀고 헛기침을 하더니 하나는 먼 산을, 하나는 회사 빌딩을 보다가 거리를 두고 건물에 들어갔던 것이다. 어느 날은 친구가 조용히 전화하려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는데, 바로 위층 계단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까르르 소리가 저것은 분명 썸을 한창 넘어선, 연애가 들끓는 소리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인데, 이 둘은 행정 처리도 미숙했다. 연차를 맞춰 쓰는 것도 좀 머리를 쓰던가. 너무도 똑같이 같이 빠지면 티가 날 텐데, 팀원들이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사랑이 들끓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건지 꼭 같은 날 연차를 썼단다. 휴가야 뭐 그럴 수 있다고 백번 양보하자. 대체 왜, KTX 표는 출력해놓고 안 가져간 거냐고 친구가 속상해했다. 남과 여 각자의 이름으로 출력된 A4용지 기차표에는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목적지가 새겨져 있었다. 아, 이쯤 되면 알아달라는 것인가. 친구는 이 티켓을 그들의 KTX에 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메신저 사건도 소름 돋았다. 용무를 전달하기 위해 서성대다가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 슬쩍 다가갔는데, 2m의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랜선으로 쪽지를 날리고 있었다. 자기는 왜 이렇게 예쁘냐고, 이번 주말에는 뭐 하고 놀자고. 이들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다가는 타버릴지도 모를 열애 중이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가 멈췄다. 친구는 목을 가다듬더니 어느 날부터 이런 뜨거운 장면을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의 얼굴에 발그레한 빛이 사라지고 시퍼런 수심이 가득한 것 같다고,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고 했다. 눈이 내리던 어느 날 회의실에서 한바탕 소란이 발생한 모양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열어보니 그 둘만 있었고 공기 중에 분노와 어리둥절함, 그리고 묘한 느낌표가 혼란스럽게 뒤엉켜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언제부터 둘 사이에 냉기가 흐르기 시작한 걸까. 결국 친구의 눈에도 다투는 모습이 들어왔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길, 계단 옆 대리석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누가 봐도 싸우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유독 시력이 좋은 친구의 눈에는 턱과 얼굴이 마구 움직이는 커다란 행위가 눈에 띄었는데, 그들의 사랑이 급속도로 식어 남극에 도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느냐고? 각자 일에 빠져 사는 것 같다고, 둘 중 한 사람은 열심히 소개팅하는 것 같다며 애석해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연말에 남자가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서 두 사람도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쨌든 이 둘은 공식적인 커플이 아니었기에 지금 상황이 조금은 다행이라 생각한댔다. 친구는 그 커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비밀을 지켜주고 나름대로 응원하고 있었는데, 요즘 그런 재미가 없어서 꽤 큰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친구와 헤어진 4월의 어느 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내 마음 액자에 담으며 걷고 있었다. 벚꽃이 들끓으며 밤하늘을 밝혔고 집에 다다르자 골목길 가로등 하나가 외롭게 빛을 잃었다. 기묘한 밤이었다. 문득 사랑에 온도가 있는 건 아닐지 궁금해졌다. 상대가 사랑이 될지 모르고 만났을 처음부터 그 온도가 꿈틀대고 있을까? 아니면 냉정과 열정 사이의 딱 중간 지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걸까. 어떤 화학 작용으로 두 사람은 눈이 맞고 뜨겁게 타오르다가 고꾸라지듯 식어버리는 걸까. 이 과정을 누군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 일 년간 냉정과 열정 사이를 격렬하게 누빈 그들의 시간은 훗날 어떻게 남을까. 액자 속 이야기로 끝나려나. 아니면, 냉정의 시간이 흐르다 요동칠 어떤 지점을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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