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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n 29. 2020

회사원의 도시락

나를 위한 한 끼에 담긴 그 시절

회의실이 비어있었다. 며칠간 지켜본 끝에 이곳으로 정했다. 이제는 뻔한, 그저 그런 식당이 지겹고 자꾸 집 밥이 그리워져 도시락을 싸오기로 했다. 회삿밥 먹은 지 좀 되었으니 우리 팀에서 운영하는 밥 펀드에서 이탈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아주 귀하게 만난, 마음이 통하는 동료와 함께 점심값도 아낄 겸 간단하게나마 도시락을 싸오기로 했던 것이다.



퇴근길 집 앞 마트에 들렀다. 소시지, 어묵, 카레, 달걀 따위를 사면서 한 주간의 식단을 짜 봤다. 적당한 도시락통도 구해 퇴근 후 가방을 놓자마자 반찬부터 만들었다. 레시피를 찾아 계량 숟가락으로 덜덜거리며 양념을 해서 누가 봐도 풋풋한 노력이 묻어나는 반찬을 만들었다.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알람을 맞추고 출근 전에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쌀을 미리 씻어 두고 일어나자마자 취사를 눌렀다. 머리를 말리며 소시지를 굽고 어제 만든 어묵볶음과 엄마표 무말랭이를 반찬 통에 조금씩 담았다. 국물이 샐까 봐 은박지와 랩으로 싸고 갓 된 밥을 잠시 식혀 그릇에 담고 뚜껑을 덮었다. 출근길, 핸드백과 도시락을 담은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혹시나 반찬이 들어있음이 탄로 날까 봐 도시락 가방 입구를 철저히 포갰다.



오전 내내 사람들과 씨름하는 동안 나의 도시락이 식어 갔다. 열두 시가 가까워지며 팀원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드디어 둘만 남았다. 눈짓으로 사인을 교환하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새댁이셨던 동료분께서는 지난 주말에 시댁에 다녀왔다며, 어머니께서 듬뿍 주신 반찬을 맛보라며 권하셨다. 소박하기 짝이 없는 내 도시락이 덜덜 떨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우리는 각자 앞에 흰 밥만 있을 뿐 서로의 반찬을 경계 없이 나누고 있었다. 비주얼만으로도 주부 경력 30년 이상의 어머니의 반찬, 어른이 되어도 맛있는 소시지, 어설프게 만든 어묵볶음도 이만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받아가며 즐거운 점심을 뚝딱 해치웠다.



어느 점심 도시락 시간, 데친 양배추와 쌈장을 싸왔다. 동료의 집에서는 간장에 싸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렸다. 다른 팀에 계시는 시크한 과장님이셨다. 우리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셨는데, 과장님의 손에도 도시락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워킹맘이셨던 과장님은 아침에 바쁘셔서 도시락은 생각도 못 한다고, 다이어트를 할 겸 카페에서 샐러드를 사 오셨단다. 들던 밥 맛있게 먹으라며, 책을 보며 포크로 점심을 드셨다. 중간중간 우리와 말씀도 나누면서 그간 멀리 느껴졌던 과장님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가볍게 하시고 휴게실로 주무시러 가셨다.



어떤 날은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대리님이 들어오셨다.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로 나가서 밥 먹을 시간이 없다고, 삼각 김밥과 컵라면을 갖고 들어오셨다. 밤마다 아기가 울어서 요즘 자는 게 아니라고, 부모님이 돌봐주시는데도 이렇게 육아가 힘들다며 고충을 토로하셨다. 오늘도 퇴근이 늦으면 아내가 많이 힘들 거라고 그분의 머릿속에는 9할이 가족, 그리고 1할은 보고서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나중에 우리에게 밥을 사주시겠다고 하셨는데, 대리님 끼니나 좀 제대로 챙기시기를 바랐다. 이렇게 식사하신다는 걸 사모님을 알고 계실까.



우리의 도시락은 점차 소문이 나서 도시락 멤버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반찬 가짓수도 다양해졌다. 조용하던 회의실에서 웃음도 새어 나고 북적댔다. 그러나 늘 훈훈하지만은 않았다. 식사 후 깨끗이 정리하고 환기까지 시켜서 증거인멸을 했지만 꼬투리 잡기를 좋아하던 어떤 분은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시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도시락은 이어졌고 학창 시절 그랬던 것처럼 점심시간이 기다려지던 이유가 됐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한창 붐이 불다가 어느 순간 도시락 부흥 운동도 주춤해졌다. 더워지면서 음식이 상할까 걱정이었고 아침마다 부산 떨던 것을 잠시 쉬자고 했다. 다시 식당으로 향했고 팀원들과 먹기도 하고 그러다 발령이 나면서 도시락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를 위한 한 끼였다. 내가 나에게 주는 정성이었다. 하나의 도시락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실천이 담겼던가. 도시락 특유의 향수는 그 옛날이나 회사원 때나 다르지 않았다. 도시락을 꺼내면서 두근대던 마음, 동시에 혹시나 국물이 새지는 않았을지 걱정도 되던 그 시간. 짜잔, 뚜껑을 열고 오전의 안부를 물으며 바라보는 오늘의 한 끼. 식은 밥의 온기, 하나로 뭉쳐 뻑뻑해도 기다렸던 맛, 차거나 뜨거운 온도를 잃어 먹기 적당했던 반찬들. 동료의 도시락도 항상 궁금했다. 젓가락을 멀리 뻗어 조심스럽게 맛보던 그 댁의 반찬. 담소로 이해할 수 있었던 서로의 마음과 생각. 다른 집의 먹거리 이야기도 알게 된 날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면서, 함께 먹으면서 일과 사람에 대한 고민을 잊을 수 있었다. 그때만큼은 오로지 즐겁고 편안한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떠오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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