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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l 30. 2020

신입사원의 야간 산행

당신에게 보여주지 못한 내 마음

연수 준비물에 등산복과 등산화를 챙기라고? 입사식을 앞둔 주말, 짐 가방을 꾸리면서 앞으로 어떤 날이 펼쳐질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슨 교육을 받기에 합숙을 하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는 왜 야간 산행이 있을까. 궁금증이 증폭되었지만 동시에 두근거림이 나를 지배했다. 얼마나 꿈꾸던 순간인가. 신입사원이라니, 연수라니. 하루아침에 변한 나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빵처럼 부풀었다. 입사식부터 외딴곳에서 진행한 연수까지 몹시 빠르게 흘렀다. 드디어 산행 날. 오후가 되니 등산복을 입은 상사들도 도착하셨다. 어디 부서에 누구 부장이라고 들어도 뒤만 돌면 잊어먹기 일쑤지만  자기소개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오대산 입구였다. 그러니까 그곳은 합숙 연수의 끝을 알리는 곳이자, 야간 산행의 시작점이었다. 이 밤 20km를 함께 걷는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라며 인사팀 선배는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며 시린 손을 주머니에 꽂았고, 덜덜 떠는 입술을 가끔 떼면 청정한 밤하늘에 새하얀 입김이 짧게 퍼졌다. 난데없이 사진을 찍자고 해도 고분고분 협조는 물론, 새로운 분과 통성명을 하고 “아, 저도 그 부서에서 일하고 싶어요.”라며 한밤중 설원에 생기를 심었다.     



수십 개의 랜턴에 의지해 눈 덮인 산길을 밟았다. 풍경이라고는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눈길에 미끄러질까 조심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동기들은 각자 흩어져서 선배들, 아니면 부장님들과 함께 걷는데 모르는 사이 내 옆에는 이사님이 계셨다. 이사님은 산을 참 좋아하신다고, 신입 직원과 함께 걷고 싶어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셨다는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말이 어울릴지 몰라 그저 웃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 분들이 나타나 이사님과 대화를 이었다.     



발이 시렸다. 두꺼운 운동화를 골라 왔지만 눈길에는 속수무책인가 보다. 잠시 멈춰 신을 정비하던 중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고 금세 구급차가 다가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차는 우리 꽁무니를 계속 따라왔는데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대비한 차량이었다. 그런데 그 하얀 차에 더 하얀 선배가 올랐다. 시작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결국 탈것 찬스를 잡은 것이다. ‘아, 부럽다.’ 나도 아프다고 할까. 동시에 옆으로 폐가가 보이면서 순간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 자각을 깨뜨리는 유쾌한 선배 한 분이 나타났다. 비슷한 연령대라 통하는 농담이 반가워 대화를 많이 나눴다.     



자정을 넘겨 어떤 마을에 멈췄다. 인사팀에서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부어주고 초콜릿이나 귤 같은 주전부리를 나누며 휴식시간을 가졌다. 겨울밤 산중 라면 국물에 심취한 것도 잠시, 이 짓을 다시는 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다들 좋은 표정이지만 왠지 내 마음과 같으리라. 짧은 휴식 후 다시 걸었다. ‘노래를 시키면 어떡하지?’ ‘여기서 그냥 집에 가면 퇴사당할까?’ 별생각을 다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별안간 우리 앞에 버스가 서 있었다. 심지어 모두 탑승하랬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었고 기상 확성기 소리에 눈을 떠보니 눈앞에 겨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잠에 취한 우리는 모두 동해를 바라보며 풍선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근하신년 OO 회사 파이팅!’ 이런 느낌의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어댔다. 내 인생 첫 일출이었지만 감회는 제로. 그저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또 어딘가에 모여 사우나를 하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초당 순두부 가게에서 아침을 먹었다. 불편한 목욕은 피하고 싶었고 순두부 맹탕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몽글몽글 피어오른 하얀 순두부에 퍼지던 간장처럼, 내 영혼에 얼룩이 지기 시작한 무렵이. 겨울밤 산행은 직장생활의 서막이었으며 내가 사회인으로 변하던 길이었으리라.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려 하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강원도 어떤 마을에서 출발한 버스가 서울 한복판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 잠이 들었고 회사에 도착해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하고 명절 선물을 챙겼다. 그게 또 기뻐서 방방 뛰며 감격의 첫 퇴근을 맞이했다. 마침 설 연휴가 시작하는 날이라 본가로 향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리 잠만 잤다. 부모님께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밥 좀 먹고 자라고 흔들어 깨우셨지만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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