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하는 시간
“엄마, 화났어?”
응. 그런 것 같아. 아니, 잘 모르겠어. 너에게 화가 난 건지 나한테 화가 난 건지. 복잡 미묘해서 딱히 뭐라 꼬집을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기분이 좋진 않아. 지금 이 감정은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쳐 폭발한 것일 텐데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순서로 배열된 건지 기억이 잘 안 나. 소름 돋을 정도로 촘촘한 기억력을 뽐냈던 내가 지금은 오늘 점심 식단이 뭐였는지도 골똘히 생각하네. 그래서 왜 이런 기분인지 말할 수가 없네, 지금은. 조금 전의 사건을 재구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화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내 속에 수많은 자아 중에 엄마인 나와 최초의 내가 이것만은 꼭 지키자고 약속한 거라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잠시 자리를 비켜 딴청을 피우는 것 같지만 내 마음은 소용돌이에 갇혔어. 네가 상처 받지 않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끝없는 질문을 하면서 엎어진 엄마 자아를 불러와. 너보다 30년을 더 오래 살았으니 그간의 지혜를 끌어 모아보려고. 그래서 울고 있지만 안아줄 수가 없네. 엄마 마음도 아파.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줄래?
너와의 하루에 웃음만 가득하다면 참 좋겠지만 삶이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단지 노력을 할 뿐, 그 노력도 여러 변수에 의해 의미 없어지기도 하고 또 탄력을 받기도 하지. 이런 복잡함 속에서 하루하루 너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은데 오늘 냉랭한 모습을 비춰서 미안해. 엄마 마음이 원래 그렇지는 않았단다.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남겨놓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용기를 내보았어.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설거지하는 내게 다가와 옷자락을 붙잡으며)
“엄마, 이거 뭐야?”
(내 미간에 있는 여덟 팔(八) 주름을 가리키며)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작은 입술을 조심스레 움직이는 질문에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제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입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이럴 때 잠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정말 기분이 안 좋았기도 했고, 아니면 피로가 누적되어 얼굴에 표가 나타났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놀랐습니다. 나의 감정을 다 알고 있구나. 내가 불편한 마음을 주었구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아이가 물어보니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차근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궁금함을 표현할 수 있기도, 엄마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차분하게 듣고 있는 아이도 제 마음을 이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미안함이 몰려오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기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미간 주름이 보이면 엄마에게 말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놀지만 엄마이기에 문득 떠오르는 아까의 상황이 자꾸 맴맴 돕니다. 뽀얗고 솜털 가득한 얼굴에 뚝뚝 떨어지던 설움의 눈물이 예쁘면서도 아팠습니다. 부디 오늘 하루로 우리가 지혜를 얻었기를 바라며 더 사랑할 마음을 다져봅니다. 어제보다 더 굳게. 더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