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untitle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달 엿새 May 29. 2020

집안일 수렁

망중한, 그 순간을 위해

어김없이 아침은 오고 여전히 잠이 가득한 몸을 이끌어 거실로 나온다. 무의식으로 어디론가 향하던 나를 멈추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곳에 서서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타오르는 감정을 애써 수습해본다. 주인이 잠든 장난감은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건조기 속 마른 수건은 구겨지는 중이다. 정돈해야 할 접시는 과연 우리 집에 세 사람이 사는 게 맞는 건가 싶고, 각오하고 열어본 다용도실에는 빨래 좀 처리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먼지는 나를 따라다니며 청소 좀 하라고 잔소리하고 욕실은 말하자면 입 아프다. 아, 분리수거! 상자에 담긴 재활용품이 팝콘처럼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모든 게 위태위태하다. 기상과 동시에 피곤이 쌓인다.



가장 처음으로 빨래부터 시작한다. 세탁기 오늘 열일하게 생겼다. 산처럼 쌓인 수건을 먼저 모아 첫 번째로 세탁기를 돌린다. 어두운색 빨랫감은 두 번째 차례고, 민감한 옷과 아기 옷은 따로 모아 손빨래를 해야겠다. 내가 이렇게 빨래를 안 하고 살았나, 오늘 옷은 제대로 입고 나갔겠지? 순간 자괴감이 몰려온다. 세제를 넣고 헹굼을 추가해 버튼을 누르니 곧 물이 차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그다음 일을 생각한다.



접시를 정리하자. 식기건조대 위에 온갖 그릇들이 본인의 존재를 뽐내는 중이다. 대체 어제 뭘 먹은 거지? 뭘 했기에 이렇게 그릇이 많이 나온 걸까. 깨끗이 말랐다면 그대로, 물기가 모여 있다면 키친타월로 닦아 제자리에 착착 쌓는다. 가끔 식기끼리 부딪치면 이곳이 호텔 조식을 먹는 곳이 아닌가, 이런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몽상에 빠져보기도 하는데. 이 야무진 꿈은 아기의 기상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접시를 닦다 말고 즉시 아기를 안아준다.



아기와 집안일을 함께할 작정이다. 먼저 침실 창을 열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구석구석 청소기로 먼지를 없애본다. 자꾸 자기가 하겠단다. 그 장단과 기 싸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힘겹게 집안 탐험을 마친 청소기를 보니 너도 샤워가 필요하겠다. 그리하여 청소기 입구도 한번 닦고, 모은 먼지도 시원하게 비워준다. 물걸레질도 하고 싶지만 귀찮다. 건조기에서 마른 빨래를 빼네 곱게 갠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점심때다. 점심을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며 주방에 도착하니 아까 닦다 만 접시가 그대로 있었다. 아, 이 접시는 어쩜 이렇게 고스란히 날 기다리고 있었을까.



매 끼니 맛있는 음식을 꿈꾸지만 그마저도 생각으로 멈춘다. 오늘도 조금 커다란 접시에 밥과 반찬을 한 곳에 담고 단백질이 부족하니 달걀프라이도 하나 얹는다. 아기 맘마는 잘 익힌 달걀프라이와 두부 구이, 오이와 토마토를 준비한다. 식탁에 접시를 옮기고 아기의 시중을 들며 드디어 한술 뜨려 하는데 눈치 없이 세탁기가 자기 일 다 끝냈다고 노래를 부른다. 아, 하필! 꼭 밥 먹고 있는데 저러더라. 그냥 두자니 빨래가 찌글찌글해질 것 같아서 빠르게 건조기로 옮기고 아까 두 번째로 돌리려 한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는다.



우여곡절 끝 점심을 다 먹으니 좀 전까지 예뻤던 그릇은 설거지거리로 변신했다. 빨리 치우고 싶다는 생각에 어서 싱크대로 옮겼다. 점차 이곳이 채워지고 선을 넘더니 차곡차곡 쌓인다. 이번에는 본인 먼저 챙겨달라고 하는 것 같다. 아기의 눈치를 보며 설거지를 시작한다. 거품을 묻히고 깨끗하게 헹궈 다시 식기건조대 위에 올린다. 설거지를 마치니 저녁밥이 있는지 궁금하다. 밥솥을 확인하고 나중을 위해 쌀을 미리 씻어 놓는다. 내 다리에 보드라운 손길이 감싼다. 아기가 눈을 비비며 잠투정을 한다. 그러면서 씻겨달라고 한다. 머릿속이 잠시 심란하지만 우선 씻기로 한다. 한참 욕실에서 놀다가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어느새 아기가 잠들었다. 기쁜 마음이지만 들뜨지 않도록, 폭신하게 준비된 침대로 옮기고 방문을 닫는다.  



앉을 새가 없다. 미뤄놓은 손빨래를 해치운다. 세탁기 탈수만 댓 번 정도. 건조기에 건조대 2개, 베란다 건조대까지 모두 끌어 빨래를 펼치는 작업을 끝내니 한적한 오후가 나를 맞이한다. 나만 알 수 있는 말끔해진 집안과 기분 좋은 빨래 향이 잠시나마 사치 같은 상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아, 이 와중에 커피가 몹시 당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식탁에 앉아 마시며 쉬는데 바깥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왔다 간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숨을 죽여 기다리다 몇 번의 고비가 지나갔다. 어렵사리 얻은 달콤한 시간을 잠깐, 아주 잠깐 즐기던 중 익숙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망중한 종료.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에 만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