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untitle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달 엿새 May 30. 2020

도심 속 길을 잃다

나 홀로 헤매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 기억이 가물거린다. 사람들 속에 끼어 왠지 모르게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면접을 보고 버스를 타러 가던, 사람에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 택시를 타고 찾던, 그 언젠가는 손잡고 거리를 걷던. 오늘은 꼭 그곳에 닿고 싶었다. 오늘처럼 좋은 날씨에 반드시 홀로 떠나고 싶었다. 이 마음을 넌지시 비추니 two Kims께서 흔쾌히 나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흥얼거릴 뻔 한 노래도 감추고, 빨리 다녀오겠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신난다!



토요일 브런치 시간. 버스를 탈까 고민하다가 그냥 걸었다. 보도블록 공사에 소리가 요란스러웠지만 그마저도 반가웠다. 스니커즈를 신고 가볍게 걷는 느낌을 마음껏 누린다. 얼마 후 엄습한 초여름 더위가 현실로 다가왔고 물 한 병을 사서 친구처럼 대동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곳인데,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니 이렇게 빨리 내려오는구나.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동쪽으로 새로운 역이 두 개나 생겼다. 바이러스로 멈췄던 지하철 여행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새삼스러움을 더했다.



기다리던 열차의 문이 열렸다. 한 자리씩 띄워 앉은 모습에, 마스크를 모두 착용한 모습에 나도 질서정연하게 동참해야겠다. 마음이 이끄는 자리에 앉아 Purple Line을 홀로 즐겼다. 익숙한 동네를 하나씩 벗어나니 아기와 함께 환승을 하던 구간에 많은 사람이 내린다. 오늘은 더 오래 가야 한다. 문이 닫히더니 꽤 오랫동안 지하철이 움직인다. 한번은 섰을 법한 시간이 흘러 열차는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문득 내가 한강 밑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강을 건너니 낯선 동네가 하나, 둘씩 나타난다. 열차에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몇 번을 반복하더니 어느새 도시 중심에 다가온다.



심장이 뛴다. 내 마음과 발이 닿고 싶었던 이곳에 도착했다. 왼쪽 문이 열리자마자 내렸다. 순식간에 출구를 확인하고 그 복잡한 곳을 숱하게 다녔던 그 느낌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기다란 보라 지하철 덕에 쭉 걷다 보니 높은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니 에스컬레이터가 나오고 9년 전 영어 학원을 가기 위해 매일 지나다닌 내 모습이 느껴진다. 유독 깊은 곳에 묻힌 것 같은 지하철을 벗어났는데도 지하다. 몇 번 출구였더라. 5번이었던 것 같은데, 알고 보니 3번이었다. 조금 걷다 보니 출구가 나오고 목적지가 보였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되는 그곳을 외면하고 정면에 쭉 이어진 길이 궁금했다. 이 길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여기로 나가면 충무공이 계시려나? 모르겠다. 우선 가보자. 인적도 드문 그곳을 호기롭게 걸어갔고 계단을 오르니 빛이 보였다. 자외선 강한 여름의 햇살이 조용히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여긴 어딘가? 사방을 둘러봐도 충무공은 안 계셨고 낯선 빌딩, 그리고 무교동 낙지음식점들만 보일 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인데. 공간지각력이 없는 뇌로 인해 순간 길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내 눈에 사과나무가 보인다.



오호라, 사과나무가 여기 있네? 알 수 없는 존재들의 나열은 나를 이상한 나라로 안내했고 괜스레 기분이 좋아 나무 밑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 귀여운 상추도 찾아냈다. 찰칵찰칵 갑자기 셔터 소리가 가득 찼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 혼자 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목적지로 향했다. 좁은 도로를 건너고, 모든 기억력을 발휘해 큰 도로를 따라가 보았다. 왼편에 우체국이 보인다. 이제야 알겠다. 드디어 GPS가 탑재되어 마음이 놓였는데 아까 봤던 상추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안 되겠다.



다시 그곳을 찾았다. 상추가 땡볕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다. 이 상추 얼마나 맛있을까 싶으면서도 볕, 비, 바람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상추이기에 그대로 이곳에 남아 줬으면. 나름대로 밭고랑도 있어서 붉은 상추, 연두 상추가 나뉘어 있었다. 청소년 같은 사과나무를 그늘 삼아 다 함께 이겨내 주는 것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기특했다. 이 텃밭 누가 이렇게 귀엽게 만들었을까. 도심 속 볏짚을 덮어 쪼르르 이은 작은 담은 나를 소인국에 초대한 것이 틀림없다. 불긋한 꽃도 놓칠 수 없고 노란 꽃에 벌들이 윙윙대며 몰려오는 모습도 구경한다. 확실한 것은 자세히 보니 더 예쁘다. 그러나 벌에 쏘일 뻔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목적지로 향했다. 아주 오랜만에 친한 선배를 즉흥으로 만나기로 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좋은 향이 가득한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헤매고 있었다. 나지막한 음악과 두런두런 말소리, 그리고 책 내음이 그 세상에 나 홀로 집중토록 도와주었다. 책을 훑어보며 아주 기다란 책상에 앉아볼까도 하고 몇 번이나 꺼내기도, 놓기도 하며 오늘의 목적을 마음껏 누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도착했다. 마스크를 쓰고도 확인할 수 있는 서로의 모습에 우리는 다시 12년 전으로 돌아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안일 수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