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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n 02. 2020

누가 밥 좀 해줬으면 좋겠네

남이 해 준 밥이 가장 맛있어요

그런 날이 있다. 좋아하는 일인데도 갑자기 흥미가 0으로 수렴하는 날. 모든 게 귀찮아지면서 그 기운이 온몸 가득 짓누르는 느낌으로 가득 찬 날. 묘한 분노와 무기력이 내 깊은 어딘가에 묵직하게 차지해서인지 어떤 방법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날. 요즘 내게 요리가 그것이다. 태업인가, 파업까지 가려나. 귀차니즘이 조정해서인지 도통 요리가 쉽지 않다. 쌀을 씻기도, 냉장고 재료 재고 확인도,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시장에 가는 일도 모두 그냥 귀찮다.



원래 이렇지 않았다. 요리를 즐기고 심지어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신혼 시절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실험적인 음식을 준비하고 맥주와 함께하는 날들이 많았다. 절친한 사람들을 초대해 자발적으로 집들이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날이 점차 줄기 시작했는데, 육아를 시작하면서 내게 요리는 미션이 되었기 때문이다. 육아만으로도 어려웠던 시절 청소, 빨래, 밥까지 챙기려니 주부 0단이었던 그때 나는 너무나도 벅찼다. 자연스레 식사는 배달음식을 자주 찾았고, 어머니들의 도움으로 반찬을 조달하여 먹는 날이 많았다.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 하루에 최소 두 번, 확정되기 전까지 숱하게 반복하는 그 고민. 가뿐하게 생각해서 맛있게 먹는 날도 있지만, 내가 집안일의 수렁에 빠지게 되면 그날 주방은 문을 닫아버릴 수 있기에 위태롭다. 자꾸 딴생각만 나서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저 멀리 여행을 떠나본다.




1. 학교 다녀오면 현관문 밖까지 새어 나오는 음식 냄새, 또각또각, 보글보글 음식 소리, 기다린 끝에 맞이한 몇 가지 반찬과 윤기 흐르는 새 밥. 당연하게 받았던 그 밥상. 손도 대지 않았던 어른들의 반찬. 볼멘소리 반찬 투정. 그 밥상을 두고 동생과 싸우던 시절.


2. 대학 때 오랜만에 집에 가면 나를 기다리던, 내가 좋아하는 음식. 시험이 망쳐도, 면접이 떨어져도, 미래가 암울해도 나를 채워주던 그 식탁의 온기


3. 유일하게 숨통이 트던 시간, 약 11시 40분부터 13시까지. 오늘은 뭘 먹을까? 지갑과 핸드폰을 들고 팔짱을 끼며 찾던 회사 근처 맛집. 그렇게 일 얘기를 반찬 삼다가 말다가 퇴사하면서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건만, 종종 생각나는 그 시절 좋아하던 회사 근처 음식점. 집 밥도 잊게 만드는 회사 밥.




누가 밥 좀 해줬으면 좋겠네. 그러네, 그리워하던 모두가 다 내가 한 밥은 아니었네. 여기에는 요리하는 사람의 노고가 담겼음을. 집 밥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그런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식단을 짜고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양념을 준비하고 본격 요리를 하고 그릇에 담아서 내고, 산더미 설거지를 하고 또 치우고. 아, 쓰고 있는데도 벌써 피곤이 몰려온다. 그렇다. 집에서 밥을 한다는 것은 힘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간 나는 받기만 했기에 모르고 살다가, 주부와 엄마가 되며 이 과정의 피곤함을 몸소 깨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배달과 외식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로 여행을 떠나면서 그때 그 음식이 너무나도 떠올랐다. 그런데 동시에 엄마의 모습도 떠올랐다. 저녁때면 뭘 해야 하나, 얕은 한숨이 느껴지던 엄마의 뒷모습, 밤 근무를 마치고 아침을 먹이겠다고 부랴부랴 챙기신 모습, 학교 다녀오면 빈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식탁에 있던 찌개와 몇 가지 반찬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든 끼니를 챙기게 하신 엄마의 노고이자 사랑이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오늘 주방은 쉬게 할 수가 없었다. 깨끗한 손으로 쌀부터 정성스레 씻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주말에는 반드시 시켜먹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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