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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n 15. 2020

즉흥 나들이

그곳의 바람을 담아 온

즉흥을 즐기지 않는다. 예상에 없던 제안이 불쑥, 내 앞에 도착하면 머뭇거리기 일쑤다. 고민하는 찰나 이에 응했을 때 따라오는 수고스러움이 떠오르면서 이내 마음을 장악하려 하기에. 게다가 뜨겁거나 차가운 날씨나 몸과 마음의 누적된 피로는 솔깃한 속삭임을 거부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바깥은 불볕더위가 뻔하고 몸과 마음도 피로에 덮여 모든 게 적절하지 않았던 지난 주말, 난데없이 백숙 제안이 들어왔다. 역시 망설였는데, 갑자기 마음에 물방울이 퐁퐁 터지는 듯 이해할 수 없는 생기가 솟았다. 낯선 곳이 선물하는 기대감만이 나를 감쌌고 평소 내밀었던 갖가지 핑계는 안중에 없었다. 그곳에서 무얼 할지, 어떤 음식을 먹고, 집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가는 것만으로 모든 게 충분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달궈진 차에 오르니 여름휴가를 떠나는 기분이다. 더위가 만만치 않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신호 몇 개를 지나 어느새 교외로 향했다. 금세 길이 좁아지고 산에 둘러 싸여 있었다. 곧이어 어색한 지명이 이어지고 외딴곳에 들어가 결국 차를 돌리면서 이 길이 맞나 싶기도 했다. 의심은 재빨리 사라졌다. 첨단 내비와 직감으로 계속 길을 잇다 보니 왠지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산속에 늘어져 있는 자동차 무리를 지나 좁은 산길을 올랐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잠시 기다리기를 반복하며 고도를 높였다. 창문을 내리니 산중 바람과 가까이서 들려오는 닭 울음은 낯선 장소에 도착할 우리를 반겼다.



점점 좁아지는 산길에 손두부, 도토리묵, 백숙, 한정식집을 지나니 목적지가 보였다. 그곳은 산중에 넓은 주차장을 완비한 한옥 마을 같았다. 강렬한 햇볕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서 그 안에 들어가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었다. 대문을 지나니 장독대 마당이 있고 반대편에 꾸며놓은 정원에는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뒷문도 활짝 열린 별채에 나무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음식을 들며 담소를 나눈다. 낮은 담 넘어 계곡이 흐르고 초록, 빨강 나뭇잎은 계절을 잊게 했다.


자연 속 식당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기다림의 지루함도 잊었다. 안내받은 사랑채 앞에서 신발을 벗고 높은 문턱을 넘자 그 옛날 할아버지 댁 사랑방에 앉은 기억이 몰려왔다. 문을 열어 바람과 소리가 자유롭게 통하는 그곳에 누워 평온한 오후를 보내던 어린 내가 함께 있었다. 지금 내가 앉은 이곳도 시원한 바람이 통하고 울창한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반가웠다. 곧 매미 소리로 가득하겠군, 소나기가 내려 처마 끝에 빗물이 이어져 그 바람에 봉숭아가 흔들려도 운치 있겠어. 한겨울 장독대 뚜껑 위 소복하게 쌓일 깨끗하고 하얀 눈도, 따뜻한 봄을 유영하는 나비도, 알록달록 단풍을 배경으로 날아다닐 고추잠자리도 이 문을 열면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일 거야.



오랜만에 만났기에 안부와 근황을 나누다 보니 백미가 상에 올랐다. 상차림에 감개무량해 한참 쳐다보다가, 바람을 느끼고 이따금 창밖도 응시하며 음식을 즐겼다. 닭백숙, 도토리묵, 파전과 육전, 막걸리는 거들 뿐이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이유로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다. 속세를 떠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잠시 엿본 그 맛에 여운이 짙을 예정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예상대로 빨랐다. 헤어짐이 아쉬워 속세에 돌아와 커피를 나눴다. 시끄러움에 대화를 오래 할 수 없어 재빨리 떠나는 주말을 보내줬다. 몰려오는 피로로 지친 몸에 휴식을 주니 몇 시간 전의 정경이 아른거린다.



즉흥 나들이는 내 마음에 그곳의 바람을 담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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