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일 글쓰기
어떤 이른 봄날, 햇살이 들어오는 집에 홀로 있는데 어디에선가 빗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가니 지난겨울이 녹는 소리였다. 겨우내 켜켜이 쌓인 눈이 녹다가 얼다가 반복하더니 결국, 봄의 햇살에 자취를 감추는 시기가 왔나보다. 곧이어 찾아올 꽃샘추위가 지나가면 새 학년이 될 것이다. 눈이 녹는 소리와 봄빛을 담은 새봄은 열한 살 어린이에게도 반가웠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던 길에 어제는 못 본 노란색 산수유 꽃이 눈에 띄었다. 그 옆 목련 나무 아래에는 하나, 둘씩 꽃잎이 떨어졌다. 때 묻지 않은 하얀색이 갈색으로 변하며 나무 밑을 지키는 것 같았다. 한 주가 지날수록 학교 가는 옷이 얇아졌다. 앙상했던 나무에 새순이 돋고 하루가 다르게 이파리는 나뭇가지를 감쌌다. 감나무 밑에 고추 모종을 심어 학교 다녀올 때마다 얼마나 자랐는지 바라봤다. 여린 모종이 비와 바람도 이겨내더니 어느 순간 하얀 꽃을 피우고 얼마 후 그 꽃자리에 초록 열매가 조금씩 길쭉하게 자랐다.
집 앞 감나무에 내 손바닥만 한 감잎이 매끈해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둥글납작한 초록색 아기 감도 맺혀 제법 울창해진 감나무가 1층 우리 집 창을 감쌌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나보다 키가 작은 앵두나무가 빨간색 열매 몇 개를 귀하게 품었다. 초록과 빨강이 초여름의 성탄 같았다. 붉은 과실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보니 작은 키처럼 나뭇가지도 이파리도 여렸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열매를 땄다. 이럴 수가. 힘을 세게 주는 바람에 앵두가 터져버렸다. 맑은 빨강이 내 옷에 묻었다.
삼복더위가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대추나무에 초록색 대추가 가득 열렸다. 하나 따서 한입 깨무니 햇대추 특유의 풋풋하고 아삭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날이 지나면서 점차 붉은 갈색으로 물이 들고 비와 바람에 열매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한가위가 지났다. 여름 내내 푸르던 잎은 점차 성숙한 색깔로 변하더니 어느새 낙엽이 되었다. 꽃잎과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 가지각색 잎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감도 주황빛이 되었다. 소식을 듣고 감 따러 온 사람들이 하나, 둘씩 털어가고 우리도 감을 따다 베란다에 걸어 놓았다. 며칠이 지나면 달달하고 물컹한 홍시가 되어 식구들과 하나씩 맛보았다.
찬바람이 휘 부니 나무 꼭대기에 남은 홍시 하나가 대롱대롱 걸렸다. 오늘은 까치가 안 왔나? 조용한 집에 혼자 있는데, 툭! 하는 소리가 집안을 커다랗게 울렸다. 마지막 감이 낙엽 더미에 떨어졌다. 세 번의 계절이 바뀌었으니 다시 겨울을 맞이할 차례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밤, 고요함 속 어떤 속삭임으로 문을 열어보니 첫눈이 내렸다. 가로등이 비추는 길에 눈이 얇게 쌓이고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첫눈이 골고루 내려앉았다. 나무는 사철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춥다고, 어서 들어오라는 소리에 발길을 돌렸다. 첫눈 위에 내 두 방향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우리 집 아파트 화단 (1996~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