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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n 06. 2020

오늘 내가 커피를 마시는 이유

커피 수혈이 필요할 때


좋아하는 컵을 골라 시원한 생수를 넣어 반 이상 채운다. 얼음도 너덧 조각 넣어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 작정이다. 냉장고에서 어제 내려놓은 핸드드립 커피를 꺼낸다. 조금 진하게 먹고 싶으니까 커피 원액을 평소보다 더 붓는다. 몇 년간 나만의 커피를 위한 최상의 조합을 찾고 있다. 여전히 시행착오 중이지만 요즘 가장 괜찮은 맛은 냉장고에서 하루 숙성(!)한 핸드드립 원액이 포인트다. 이 커피로 비나 눈이 올 때는 뜨거운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나른한 오후에는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물리쳐본다.   






중학교 여름 기말고사를 앞두고 공부한답시고 책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교과서와 노트, 좋아하는 펜을 색색별로 꺼내놓으며 불현듯 냉커피가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간 커피는 어른들만 마시는 기호식품으로 인식했었는데, 공부를 잘하려면 지금 커피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곧장 주방으로 가서 찬장에 있는 믹스 커피를 하나 뜯었다. 뜨거운 물로 커피를 녹이고 찬물로 가득 채워 얼음을 동동 띄워 기다리던 한 잔을 책상의 주인공으로 모셨다. 첫 모금을 앞두고 유리잔을 살살 흔들어 얼음이 컵에 부딪히게 했다. 소리만으로도 더위가 가시는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으악. 왜 이렇게 써! 뒤통수를 때려 버리는 것 같은 커피의 쓴맛에 대체 이걸 왜 마시는 걸까? 충격은 꽤 오래갔고 카페인이 서서히 퍼지는지 심장이 콩닥거려 몇 장 못 보고 책을 덮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커피를 잘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잠을 깨러 자판기에 가면 녹차 캔이나 데자와를 자주 뽑아 마셨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매점에 가면 친구 따라 빨대 컵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 전문점이 학교 앞에 우후죽순 생기면서 식사 후 코스처럼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연스레 어느 순간부터 나도 연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있었다. 특히 짜장면을 먹거나 순댓국을 먹었을 때는 무조건 아아. 이미 커피를 마셨거나 늦은 밤에는 페퍼민트나 홍차도 즐겼다.      



사회인이 되니 커피를 만들러 가자는 사람들을 만났다. 은퇴하면 커피 가게를 차릴 수 있지 않겠냐는 달콤한 속삭임에 노후 준비(?)겸 따라나섰다. 핸드드립을 배우면서 어느 날은 커피 향에 기분 좋게 취하고 어떤 날은 머리카락까지 배인 탄 향에 매운 떡볶이가 몹시 먹고 싶기도 했다. 어찌어찌 자격증도 취득했는데, 과연 쓸모가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퇴사는 했지만 너무 일찍 해버려서 가게를 차릴 수가 없다. 모쪼록 커피 수업을 들으니 뭔가 좀 으쓱했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커피 맛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상의 커피를 만들어가는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심심하고 어떤 날은 탄 맛이 강하고 어떤 날은 적당한 커피 맞추기가 오늘까지도 이어진 것이다.

     



커피와 다른 음료를 골라 마시던 내가 커피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육아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원 샷 때리고(!) 싶은 날이 많다. 아니, 무조건 아아만 찾다가도 기가 빠져 영혼이 너덜거리는 날에는 생존을 위해 당을 찾기도 한다. 그런 날은 핸드드립이 영 아니 올 시다. 카페에 가서 최고로 달달한 커피를 나도 모르게 주문하고 있다. 아니면, 지나가는 요구르트 수레를 붙잡고 바닐라라떼가 지금 당장 이 박스에 있냐고 물어본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맛과 모양은 달라져도 커피는 옳다. 요즘 건강을 위해 커피는 자제하고 다른 종류의 차로 외도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래도 커피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단 한 가지 이유, 오늘을 버텨낼 체력과 인내에 위협이 느껴지니까. 예쁜 잔에 담아 우아하게 마시지는 못할지라도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일으켜줄 에너지를 커피로 수혈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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