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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Mar 14. 2024

(일기) 죽어서 복수하자, 세상에

2018.03.14. 사랑할 줄 몰라 패악을 부리던 날들

가끔 패악질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올 때가 있다. 그것은 먹먹하고 단단한 존재감으로 혀 뒤쪽에서 치열 뒤로 굴러올 듯 넘어올 듯 울렁거리다가 사라지지 않고 혀뿌리에 납작 눌러붙는다. 주어진 고통은 원망해봐야 내 진만 뺀다. 이토록 지루한 고통에서 일찌감치 탈출할 수 있었던 방법을 택하지 않은 건 내 욕심이었으므로 직접적 표현은 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뒤돌아보면 다 현자라고, 내게도 이런저런 기회가 많았다만 다들 그 작은 기회들을 모두 포착하고 산다면 세상은 애저녁에 종교적 이상향이 되었으리라. 사실 불안정성을 제거하고 남루하든 억울하든 무엇이든 목표를 쥐어줄 커다란 선택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어린 나이의 결혼이었다. 물질적 정신적 의지가 될 안식처를 찾아 결혼하는데 무슨 사랑타령이 필요하다고. 스무 살에도 사랑이 전부라는 생각은 안 했다. 단지 내가 너무 성적이 좋았다. 할 줄 아는 것도 볼 줄 아는 것도 쓸데없이 많았다. 그게 뭐라고. 그딴 것, 살아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을.


지금은 맨몸뚱이를 회쳐먹으라고 내어놔도 안 팔릴 나이가 됐다. 삼십 년 쯤 전에는 여자가 돈 없고 못 배운 게 큰 흠이 아니었는데 그랬으면 스무 살 되자마자 큰이모처럼 어느 중소기업 경리로 일하다가 내 나이 두 배 쯤 되는 사장 재취로라도 들어갔을 것인데 허망한 상상을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뭘 하고 살지 홀어머니라도 건사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삶과 지체를 통째로 누군가에게 종속시키기에도 너무 늦었다는 것만 안다.


나는 두들겨 맞는 것도 익숙해서 시집가서 남편이 매일 대가리를 후리고 옆구리에 발길질을 하더라도 돈만 잘 갖다 주면 그러려니 하고 살았을 것인데 또 그러함을 너무 명료하게 아니 그럴 법한 인간종자는 근처에 오지도 않더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함부로 하는 재미는 제가 뭘 당하는지도 모르고 겁에 질려 허우적거리는 걸 속이고 어르고 울렸다가 달래고 바닥을 기게 만들었다가 잘해줘야 사람 희롱하고 조롱하는 재미가 온전하다. 이미 당신이 저지를 짓을 빤히 들여다보고 옳다 거래하자 하는 인간은 놀리는 재미가 덜하다.


이게 쓸데없이 뭘 많이 볼 줄 알아서 얻은 시련인데. 언젠가 어떤 어미는 카드빚을 못 갚아 딸이 자는 방문 뒤에 목을 매서 그 딸이 일어나 나오는 아침에 어미 시체를 밀고 나오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 이야길 들으면서 저것이 나의 가능한 미래겠구나 느꼈다. 빚이 너무 차오르면, 다들 그렇게들 털고 간다. 하다 하다 안 되면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다. 공부를 하면 냉소와 흥미로움이 동시에 차오른다. 이 거대한 데이터와 대표값들 중에서 나와 같은 인생은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대표될까. 분포의 끝자락에서 한없이 0에 접근하는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너나 나나 어차피 세상에 보이지 않고 사회에 포함되지 않는 삶들이다. 실은 나와 같은데 다만 자신을 글로 쓸 수 없는 인생들이여. 나는 정말이지 매일밤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을 모두 살해하고 싶어진다. 우리들이 없으면 세상의 불행과 눈물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죽어서 사회에 기여하자. 이런 개소리를 하면 내 처지와 비슷한 주제에 친구가 정색하고 말하곤 한다. 살고 싶다고. 이따위로 살아도 하나의 세계인데 세계의 값어치에 서열 매기지 말라고. 


그러면 나는 그 얘기를 삼키면서 입속의 패악도 같이 삼키고 대학 정문이나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매고 싶은 충동도 삼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자 했던 사람들, 그러나 결코 나와 같은 땅에 서 있진 않은, 그러니까 이런 독기는 평생 알지 못할 풍요로운 사람들이 느닷없이 일상의 문을 열었을 때 내 시체의 무게를 느끼도록 만들고 싶은 복수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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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짝을 만나 결혼하고 독기가 쏙 빠졌다고 합니다.

사랑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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