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을 섬기는 자

낡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

by 현우주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바리스 경(Lord Varys)이다. 그는 권력자들이 필요한 지혜를 구하기 위해 거느리는 내시로, 밀고자들로부터 정보를 모아 정세를 파악하는 정보통이다. 침착하고 위트 있게 닥친 위기를 넘어서고 세치 혀로 왕국을 뒤흔드는 바리스의 모습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는 수많은 명대사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뇌리에 남는 대사가 있다. 아래는 처형을 앞둔 윈터펠의 영주 네드 스타크와 바리스의 대화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Ned Stark : Tell me something Varys. Who do you truely serve?

Lord Varys : The Realm, my Lord. Someone Must.

(https://www.youtube.com/watch?v=Q-GSOHCVPfA)


당신이 진정으로 섬기는 자는 누구인가, 네드가 묻는 질문에 바리스는 '왕국을 섬긴다'고 답한다. 유수한 가문들 간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누구 편인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위험한 정치판에서, 사람이 아닌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빈 말이 아니었다. 드라마 속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보다는 대의를 위하는 듯했다. 그는 처음엔 몰락한 타가리옌 왕조의 부활을 돕지만 타가리옌가의 수장 대너리스의 폭정과 횡포가 점점 심해지자, 주인공 존 스노우를 철 왕좌에 앉히기 위해 가문을 배신한다. 덜미가 잡혀 사형장으로 끌려간 그는 친구 티리온 라니스터에게 말한다. "I hope I deserve this. I hope I'm wrong." 마지막에도 자신이 틀렸기를 바라며 왕국의 안녕을 바라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매거진 일을 하다 만난 어떤 분과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어김없이 화두는 정치, 그중에서도 곧 있을 서울시 보궐선거로 옮겨갔다. 민주당 후보를 찍겠다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과거 독재정권의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 정권을 찍을 순 없다고 했다. 집값이 어떻든 도덕성이 어떻든 그 원칙만은 어기지 않겠다고. 그의 신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명백한 악행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건 분명 잘못됐다. 하지만 정치는 시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책의 방향성을 다듬는 일이다. 후보가 내세운 공약이 정말 이 도시, 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지 따져 묻지 않고 감정을 우선한다면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해로운 표가 될 수 있다. 그 표는 이 나라뿐 아니라 결국 제 자신에게도 해롭다.


보궐선거 이후 이십 대 남성(이대남)이 여당 국회의원들의 십자포화를 받았다. 무려 70%가 넘는 이들이 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한 진보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는 자성해야 한다는 여론과 20대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여론이 맞붙었다. 낡은 진영 논리의 틀로 원인을 분석하려는 이들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위선적인 행태, 뚜렷한 원칙 없이 남발하는 정책들로부터 오는 역차별. 원인을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세대 교체가 이뤄질수록 '충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곧 죽어도 진보를 외치던 젊은이들은 이제 없다. 때로는 든든한 지지자로, 때로는 매정한 심판자로. '너 하는 거 봐서' 표를 던지는 이들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대남의 변심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그들은 꾸준히 의정 활동을 감시하며 성적을 매기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내칠 준비가 돼 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낡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치 가문의 일원처럼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내는 이들만 믿다간 큰코 다칠 수 있다. 왕국을 섬기는 자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제 가문의 아닌 왕국을 위해 정녕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래서부터 그런 선순환이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를 괴롭히는, 이 나라에 산적한 문제들도 해결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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