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대주의자의 여행법

온전히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by 현우주


도합 25개국을 여행했다. 도시만 바꿔 2번 이상 다녀온 나라도 많으니 횟수로만 따지만 30번 넘게 해외여행을 한 셈이다. 한 달 넘게 체류한 곳도 여럿인 만큼 나름 여행에는 도가 텄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렇게 여행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나였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여파로 하늘길이 막힌 뒤로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이제는 간간이 추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랠 뿐이다. 그럼에도 요즘 브런치 메인에는 여행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다들 여권에 먼지가 수북이 쌓였을 텐데도 부지런히 올리는 걸 보니, 나 말고도 여행의 향수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여행지와 여행 중 만나는 인연은 매번 달라지지만, 배낭을 메고 떠나는 사람은 늘 같다. 이로 인해 누구에게든 모든 여행을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가 만들어지게 된다. 만약 나에게 그동안의 여행을 모두 아우르는 테마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문화사대주의'라 답하겠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문화사대주의란 다른 나라의 문화가 자신이 속한 나라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그에 따라 위축되는 태도나 주의를 뜻한다.




마지막 여행지는 동유럽이었다. 온가족이서 하이브리드 패키지(이틀 단위로 하루는 가이드와 여행하고, 하루는 자유시간을 주는 패키지)로 간 여행이었다.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순서로 이동하며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들을 구경했다. 하지만 눈으로만 구경하는 건 여행의 참된 목적이라 할 수 없었다. 본전을 뽑아내겠다는 한국인들의 욕심은 더 많은 사진을 남기려는 부지런함으로 드러나는 법이었다.


패키지여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틈만 나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인생 사진을 남기려 들었다. 우리도 질 세라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나와 동생은 평생 소장할만한 사진을 건지는데 혈안이 돼 있었고, 부모님도 그런 우리를 위해 노련하게 구도를 잡았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마다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구경하는 현지인들. 그들의 시선이 문제인 듯했다. 그들의 언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우리를 조롱하는 듯했다. 슬금슬금 앵글 밖으로 뒷걸음치며 우악스러운 얼굴을 하는 모습엔 경멸의 감정이 묻어있었다. '동양인들이 원래 그렇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들~ 여기 한 번 서 봐"


아빠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도시를 누볐다.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틈만 나면 나를 불러 세웠다. 처음엔 곧이곧대로 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었다. 부다페스트의 지하철에서 역정을 내고야 말았다. 아빠 주변에 사람들 많을 땐 찍지 말아 줘.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라는 건 잘 알았다. 우리가 이 도시를 떠나기도 전에 들뜬 이방인들의 모습은 잊힐 테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두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머릿속에선 유튜브에서 본 댓글들이 슬라이드 쇼로 흘러갔다. '저놈이 나라 망신 다 시키네' '남의 나라까지 가서 저런데' 등등. 고작 사진 몇 방 찍는 일인데도,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그들의 눈밖에 날까 조마조마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반드시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한다. 비슷한 말이라도 그들의 말로 하면 좀 더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인사말을 외우고 나면 다음은 사과하는 방법을 익힌다. 실례합니다, 미안합니다, 몰랐습니다. 그 나라의 예절도 배운다. 부끄러운 동양인이 되지 않기 위해. 그런 뒤에야 안심하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마치 박정희 정권 때, 아직 우리나라가 못 사는 나라이던 시절 출국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예절교육을 시키던 일과 흡사하다. 여행 중에도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진땀을 뺀다. 현지인들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끊임없이 위축되는. 문화사대주의자의 여행법이다.


보통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도 줄고 마음도 가벼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 피곤한 여행법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그들과 나 사이에 등급을 나누는 사고방식은 여행을 100% 즐길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문화사대주의자가 됐을까.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눈을 길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머나먼 타국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은연중에 받은 무시와 상처. 그 상흔이 여태껏 아물지 않은 건 아닐까,라고. 푸른 눈과 흰 피부를 가진 또래들에게 당한 따돌림이 동양인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공손함을 가르친 셈이었다.


물론 피곤하다곤 해도 여행의 즐거움은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는다. 언젠가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면 나는 어김없이 배낭을 꾸리고 집을 나설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어느 곳이 됐든, 반복되는 우울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사실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다만 다음 여행은 누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전하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욕을 좀 먹으면 어때, 사람은 잊혀도 추억은 남는데. 이 당연하고도 진부한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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