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사원에서

금방 무너질 모래성에 갇혀 소중한 이를 잃지 말자고

by 현우주


이 반한다는 말은 너무도 천박하고, 분별없고, 그야말로 자아도취적인 느낌이라 제아무리 '엄숙한' 자리라도 그 자리에 이 말 한마디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 순식간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고 그저 밋밋한 폐허가 돼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인간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며 사는 주인공 요조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두고두고 읽는 소설 중 하나다. 한 인간의 심리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 또 있을까. 밑줄 그어둔 좋은 묘사들이 많다. 나는 그중에서도 '우울의 사원'이라는 표현을 특히 좋아한다. 작중 요조는 우울의 사원이 무너져 밋밋한 폐허가 돼 버리는 일을 두려워했다. 처음 읽었을 땐 이해가 안 됐다. 우울함은 백해무익한 감정 아닌가. 대체 요조는 왜 그렇게 말한 걸까. 하지만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는 요즘,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중학생 때, 하도 실실 웃고 다녀서 미친 X 아니냐는 소릴 들은 적 있다. 사춘기는 맞았지만 미치진 않았다. 나는 주변에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밝은 사람이 돼야 했고, 그래서 우울하고 힘든 날에도 억지로 미소를 달고 다녔다. 소설 속 요조처럼 광대를 자처한 셈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감정을 방치하고 숨기는 일이 만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나쁘다고,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감정들도 충분히 소화될 시간을 필요로 하며, 때로는 힘을 빼고 그런 감정에 침잠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도 배웠다. 우울의 사원에서 쉬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일련의 사건들 끝에 나도 우울의 사원을 쌓게 됐다. 이전보다 더 크고 웅장한 사원이다. 한없이 어둡지만 한편으로는 아늑한,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곳곳에서 연락이 온다. 술 사줄 테니 나오라는 친구들과 집으로 오라는 부모님, 이런저런 일을 확인하고 처리해달라는 학보원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도 연락을 피한 적 없던 내가, 연락을 무시하고 미루기 시작했다. 한두 번 더 안부를 물어오던 연락은 이내 끊겼다. 언제 답장을 해야 할까. 밀려나는 일보다 밀어내는 일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울의 사원에서 편히 쉬고픈 마음도 굴뚝같았다.


며칠 전 왕십리역 인근 중국집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었다. 테이블 한쪽엔 어버이날을 기념해 산 꽃 뭉치가 놓여있었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자녀로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몇 안 되는 날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좀처럼 얼굴을 필 수 없었다.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온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듯,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괜찮냐고, 힘들지는 않냐고, 피곤해 보인다고 물어오는 부모님에게 입꼬리만 몇 번 달싹이고는 피곤해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항상 밝은 모습만 보이며 살아요, 제게도 이럴 시간이 필요해요. 목구멍에 차오른 말을 결국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관계의 의무가 너무도 버거운 하루였다.


하지만 문득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가족과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없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됐다. 만약 이 어두컴컴한 곳으로부터 나를 끌어내 줄 사람이 없다면. 만약 모든 문이 닫히고 다시는 출구를 찾을 수 없게 된다면. 아찔했다. 어쩌면 우울의 사원에서 편히 쉴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젠간 이곳에서 나가게 되리라는 믿음 때문인지도 몰랐다. 돌아갈 집과 안길 품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그 안도감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순간에도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평생 바라도 얻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의 단단한 기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금방 사라질 감정에 빠져 그 축복을 떨쳐내려 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우울의 사원은 크고 웅장할지라도 튼튼하지 않다. 다음 파도가 몰아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너지고 마는 모래성이다. 그 안에 잠시 들어가 달콤한 낮잠을 자는 걸로 충분하다. 오늘은 잠깐이지만 소홀했던 이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려야겠다. 다시는 금방 무너질 감정에 사로잡혀 소중한 이를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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