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기자로, 늙어서는 작가로
내가 처음 글쓰기로 모종의 결과를 얻은 건 2017년 인제군에서 열린 '박인환전국백일장'에서였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나는 잠시라도 힘든 현실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백일장에 출전했다. 간부와 선임들의 눈치를 보고 담배 심부름도 하며 틈틈이 원고지에 투박한 글씨로 눌러쓴 글. 제시어는 '유년의 뜰'이었고, 이름 앞엔 '이병'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며칠 뒤 부대에 전화가 왔다. 인제군청에서 연락이 왔다고. 입상을 했으며,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글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받은 상은 차상으로, 장원 다음으로 높은 상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희열이 몰려왔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나는 글쓰기에 완전히 매료돼 버렸다. 먼저 블로그를 열심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고된 훈련으로 지친 날에도 빠짐없이 글을 업로드했다. 또한 틈만 나면 공모전 사이트에 들어가 밤새 올라온 공고가 없는지 확인했다. 주머니에는 항상 펜과 노트가 있었고, 연등 시간에도 꼬박꼬박 글을 썼다. 그러면서 점점 글쓰기와는 떼놓을 수 없는 각별한 관계가 됐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젊어서는 기자로, 늙어서는 작가로.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의 교집합에 위치해 있었다.
어려운 진로인 줄 알면서도 기자를 선택한 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모두 기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장강명과 김연수가 그랬고, 김훈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 소설을 잘 쓴다고 하면 문학적으로 수려한 문장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였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특징은 감정이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적거나 없다는 점이다. 덤덤하게 인물과 상황을 설명하는데도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차가운 얼음 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한 그런 글을 좋아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기자로서의 경험은 더 좋은 작가로 거듭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나는 하고픈 이야기를 정확한 언어로 하는, 사회가 정답처럼 정해놓은 사안들에 대해 반문을 제기하는, 누군가에게 큰 위로와 인생의 반환점이 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글쓰기는 인간의 중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이 제일 높은 차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나 쓸 수 없으며, 일정 수준의 시간과 실력이 쌓여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그런 형태의 글이라고.
부끄럽지만 나도 소설을 한 편 쓴 적 있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자마자 지워버린 소설. 눈으로 읽는 건 쉬워도 막상 써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알게 해 준 작품이었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덕분에 나름 배운 바가 있다. 소설엔 두 가지 상상력이 필요했다. 첫째, 등장인물들의 특징과 주요 사건을 정할 때 필요한 상상력이다. 어떤 인물이 어떤 사건을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정도는 미리 정해둬야 한다. 이건 소설을 안 써본 사람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예측할 때 요구되는 상상력이다. 아무리 촘촘하게 개요를 짜도 어느 순간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손을 떠나고 만다. 작가는 '창조주'에서 제삼자로 전락해, 이들의 다음 행보를 예측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작가가 억지로 정해둔 결말로 몰아가려 하면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워지게 된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소설은 두 번째 상상력이 결여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내 부끄러운 첫 작품도 이 경우에 해당했다.
아무튼 글쟁이로 살기로 했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시간은 많다. 중심을 잡고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필요한 건 필력과 상상력이다. 둘 다 근육처럼, 반복 훈련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그런 능력이다. 요즘에는 글을 정말 많이 쓴다. 그러다 보니 펜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머릿속에 든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데 익숙해졌다는 증거다.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매거진 에디터로, 기자로 활동하며 필력을 더 날카롭게 깎을 예정이다. 반면 상상의 근육을 기르는 일은 쉽지 않다. 어른이 되며 어떤 틀 안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피카소도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하지 않았나. 시작은 자전적 소설이 좋겠다. 내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 경험해봐서 잘 아는 이야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한. 그런 소설을 몇 편 쓴 뒤에야 원하는 작가로 거듭나기 위한 초석을 닦을 수 있을 테다. 젊은 날의 등단도 요원하기만 한 꿈이 아니기를 바란다.
위 글을 퇴고하다 문득 백일장에 낸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픈 마음이 피어올랐다. 인제군청에 전화했다. "혹시 예전에 백일장에 낸 작품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문화부서 주무관은 다른 부처 소관이라며 인제문화재단의 번호를 알려줬다. 인제문화재단은 박인환문학관의 번호를, 박인환문학관은 한국시집박물관의 번호를 알려줬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시집박물관 담당자로부터 작품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만 창고 어딘가에 있을 원고지는 전임자가 정년퇴직하는 바람에 찾을 수 없어, 타이핑한 파일로밖에 전해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내용이 궁금했던 터라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작품을 읽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돋았다.
□ 산문부 차상 (이병 주**)
유년의 뜰
유난히도 천둥소리가 큰 밤이었다. 잠에서 깬 나는 그 소리가 무서워 방을 나서 안방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향하던 길이 얼마나 무섭고 또 멀던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안방 문을 열고 드디어 주무시는 부모님 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누웠을 때의 그 따뜻함과 안도감 역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높은 아파트에 사는 게 무서웠고 차에 타서 달리는 게 무서웠다. 혼자 집에 남겨져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창문마다 커튼을 달아주시고 차에서는 조수석에 태워주시고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틈틈이 전화도 해주셨지만 여전히 무서웠고 그럴 때마다 더 부모님께 매달렸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도 괴롭히던 친구가, 태권도장 사부님이, 영어책이 펼쳐져있는 책상이 겁나 부모님의 품으로 피해 달아났다. 그렇게 지독히도 겁이 많았던 나에게는 부모님 곁에 있는 것이 제일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온갖 무서웠던 경험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내 유년시절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왜일까? 그것은 힘든 시간 뒤에 부모님께 안겨 안도의 한숨을 쉬던 기억들이 모여 더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무서웠던 천둥소리보다는 안방 침대에서 잠이 들 때 들리던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혼자 무서워 떨던 시간들보다는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나의 이름을 부르시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더 크게 남았기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 내가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며 자라온 유년의 뜰. 그곳은 그리 넓지 않다. 안방 침대, 좁았던 부모님 사이의 틈,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좁은 의자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품. 좁지만 모두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들로 가득한 나의 유년의 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