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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May 17. 2021

환한 전짓불 아래서

#4 이청준 『소문의 벽』


이청준의 『소문의 벽』은 잡지사 편집자인 주인공 '나'가 의문의 사내 '박준'을 만나고, 그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청준 작가는 한때 소설가였지만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진술 공포증을 앓게 된 박준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짓불의 공포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한데 요즘 나는 소설 작업 중에도 가끔 그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마치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나의 진술만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문학 행위란 어떻게 보면 가장 성실한 작가의 자기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나는 지금 어떤 전짓불 아래서 나의 진술을 행하고 있는지 때때로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때가 많다는 말이다. 지금 당신 같은 질문을 받게 될 때가 바로 그렇다…….

이청준 『소문의 벽』


술에 취해 귀가하던 '나' 앞에 난데없이 한 사내가 나타나 자신이 쫓기고 있다며 도움을 청한다. '나'는 그를 집에 데려오고 자초지종을 묻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더러 미친 사람이라고만 말할 뿐 그밖에 어떠한 진술도 하지 않는다. 특이한 건 그가 방의 전등을 끄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점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전등을 환하게 켜 둔 채 감쪽같이 사라진다. '나'는 다음날 사라진 사내를 좇아 동네 정신병원을 방문하고, 사내의 이름이 박준이라는 사실과 일종의 진술 공포증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박준의 신문 인터뷰 기록과 이전에 그가 잡지사에 투고한 소설을 읽으며 '나'는 박준을 점점 이해하고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박준의 트라우마는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6·25가 터지며 어린 박준의 마을에 경찰과 공비가 뒤죽박죽 밀려든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경찰인지 공비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박준의 방문을 열어젖힌다. 환한 손전등 불빛을 내리비추며 박준의 어머니에게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불빛 뒤 가려진 사람들이 어느 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 박준은 그 절망적인 기억의 단편을 소설에 담아낸다. 그 뒤 박준은 사회로 나와서도 똑같은 불빛을 발견한다. 독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자신만의 전짓불을 내리비추며 박준에게 답을 강요한다. 그들의 전짓불 아래서, 박준은 진술에 대한 공포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완전히 미쳐버린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은 '전짓불의 공포'로 유명한 소설이다. 수능을 준비할 당시 짤막한 지문으로 봤는데 많은 충격을 받아서인지 다시 서점에서 마주쳤을 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읽는 와중에도 숨이 턱 막히듯 답답했고 두려웠다. 만약 내가 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단서가 손만 뻗으면 닿을, 그러나 결코 볼 수 없는 거리에 있고. 무거운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이 전짓불 뒤에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나는 한쪽을 고르고 덤덤히 운명에 맡겼을까, 박준의 어머니처럼 연신 살려달라고 빌진 않았을까.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동시에 박준이 진술 공포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하게 된 대목이기도 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우리가 처음 전짓불 앞에 선 건 아마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닐까 싶다. 영리한 아이들은 물어보는 사람에 따라 답을 달리했고, 이보다 더 똑똑한 아이들은 "엄마가 아빠만큼 좋아"라는 대답을 떠올려냈다. 어렸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말하는 이의 의도를 파악할 능력이 있었다. 상대방이 원하는 답을 재빠르게 골라내는 건 인간의 내재된 능력이라 할 만했다. 물론 부모님의 전짓불은 밝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대답이 나왔어도, 그들은 똑같은 힘으로 우리를 끌어안았을 테다.


예전에 브런치에 원전에 관한 글을 쓴 적 있다. 필요 이상의 공포가 사회를 잠식했으며, 그 공포가 원전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야기했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발행만을 앞둔 상황에서, 나 또한 전짓불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읽고 나를 안 좋게 보면 어떡하지, 댓글로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대처하지.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쓴 시간이 아까워 발행을 하긴 했지만, 요즘도 원전에 관한 안 좋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브런치에 떡하니 게재된 그 글이 떠오른다. 내 글을 비추는 전짓불 뒤엔 누가 서 있을까.


원전뿐 아니다. 아무리 편하고 친한 사람이라 해도 피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동성애나 낙태 등, 누구에겐 불편하고 상처가 될 수 있는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에 대해선 각자만의 정답이 있으며, 다른 답과 마주했을 때 보통 감정이 상하고 만다. 묻지도 말고 답하지도 말아야 한다. 최근 다른 답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일을 겪은 뒤 나는 과연 우리 사회에 진정한 표현의 자유가 있는지 묻게 됐다. 총구를 들이댄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진정 우리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가. 시대가 변해도 내리쬐는 불빛의 세기는 그대로이지 않은가.


여전히 전짓불을 내리비추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만의 정답표를 들고 의견을 물어온다. 곧이곧대로 생각을 이야기하는 편이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많다. 앞으로는, 모르는 일이니 살려달라고 비는 수밖에. 전짓불의 밝기는 독선의 깊이다. 그들의 내면에 정답에 대한 확신이 짙을수록 불빛은 강해진다. 전짓불의 공포는 '우리 편'이 아닐 때 가해지는 형벌에 대한 공포다. 비록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지만 관계의 단절로 인한 아픔 역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다. 공간마다, 순간마다 전짓불이 난무하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모든 글에는 생각이 담긴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글을 쓰고, 그만큼의 생각을 담아 남들 앞에 선보이게 될 테다. 얼마나 강한 전짓불과 마주할진 아무도 모른다. 작은 브런치에만 글을 올리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글은 아닐지 검열하게 되는데 외부 투고 글이나 소설이라도 쓰게 되는 날엔 어떨지 두렵기만 하다. 나도 박준처럼 미치진 않을까. 환한 전짓불 아래서 마주하는 빈 화면이 오늘따라 유난히 넓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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