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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l 19. 2021

땅 위에서 구하라

#6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대구시 동부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남 경사'가 살해된 '민요섭'의 흔적을 좇아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된 내용은 남 경사가 민요섭의 종교관을 파헤치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중간중간 민요섭의 원고가 액자식 구성으로 삽입돼 있는 식이다. 외부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민요섭이라는 청년이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민요섭의 과거를 밟던 남 경사는 그의 죽음의 배후에 얼그러진 종교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수사의 방향을 전환한다.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민요섭의 습작을 읽으며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사건의 실마리를 좇는다. 하지만 이렇다 할 마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진척 없는 수사는 '미제 사건'으로 결론이 나 버린다. 오직 남 경사만이 포기하지 않고 민요섭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내부 이야기로 등장하는 민요섭의 원고는 예수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공간에서 태어난 '아하스 페르츠'라는 허구의 인물이 모태로부터 믿었던 종교에 실망하고 다른 신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사랑과 공의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막상 나약한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무게를 얹은 신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 아하스 페르츠는 안락한 삶을 내던지고 고된 여정을 떠난다. 십 년간 세상의 종교를 두루 섭렵하고 진리를 탐구한 그는 마침내 바랐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뒤 관중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예수를 만나 대립한다. 이처럼 성경 구절의 작은 행간에 무한한 상상력을 욱여넣은 민요섭의 원고는 남 경사의 마음을 동요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직업적인 사명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과연 그는 민요섭의 원고를 통해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민요섭이 마침내 찾아낸 신은 어떤 모습일까. 종교와 구원, 신에 관하여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준 이 책을 당신에게 권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물론 개중에는 열렬한 신앙으로 그렇게 한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 목사가 위협하듯 그려 보인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의 유황불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땅 위에 재물을 쌓지 마라'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로 시작해 그걸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몸서리쳐지는 심판과 징벌의 묘사로 끝나곤 했으니까요. -이문열 『사람의 아들』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갓난아기 때 유아세례를 받았고, 걷기도 전에 부모님의 품에 안겨 예배를 드렸다. 매일 등교를 하듯, 매주 교회에 갔다. 어린 날의 기억들도 대부분 교회와 관련돼 있다. 헌금을 내라고 쥐어준 돈으로 몰래 사 먹은 과자, 예배당에서 도망쳐 나와 종일 하던 물놀이, 잠들기 전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집사님들의 수다 등. 한때 제일 친했던 친구도 어릴 적 교회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었다. 중·고등학교도 기독교 대안학교를 나왔다. 영성과 학업을 동일선상에 두는 학교에서 나는 열렬히 하나님의 사랑을 구했다. 특히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고등학교 때의 신앙은 부모님과 목사님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를 드리우기에 충분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예배당으로 향했고, 말씀을 하루 양식으로 삼았다.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사흘간 식읍을 전폐한 적도 있다. 특히 고2 때 신의 응답을 듣겠다며 하루 종일 체육관에 누워 기도를 드리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바람이 창을 때리는 소리마저 모종의 응답으로 해석하던 모습에서 당시의 간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여느 또래처럼 나이가 들며 신앙을 잃었다. 많은 대학생이 교회로부터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다는 설교를 들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겼건만, 버티기는커녕 탕자들의 선봉장이 되고 말았다. 물론 믿음을 철회한 건 아니었다.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누군가 종교를 물어보면 이마에 힘주고 기독교라 답했다. 신앙이 바닥난 순간에도 신이 없다는 말이 모독처럼 들린 걸 보면 내 안에서 신을 완전히 밀어내기란 불가능할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정확히 무얼 믿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마르지 않는 사랑과 각자 예비하신 그분의 계획을 믿는 건지, 이내 도래할 재림과 그날에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보좌 앞에서 받게 될 심판을 믿는 건지, 동서고금 불문하고 지상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행복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찬미의 기쁨을 믿는 건지.


종교관을 곰곰이 돌아봤을 때, 나는 하나님 또는 천국보단 지옥을 믿었다. 종교가 주는 행복보다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신앙을 견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종교가 그려온 지옥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끓는 유황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이미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건 '영원함'에 대한 공포였다. 우주의 광활함을 떠올릴 때처럼, 끝나지 않는 시간의 굴레를 떠올릴 때에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영원한 기쁨으로 묘사되는 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큰 기쁨과 행복이 있더라도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영원함의 공포는 나로 하여금 신을 완전히 놓지 못하게 했다. 이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으로 치환돼 '차지도 덥지도 않은(계 3:15)' 신앙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사랑인가 공의인가. 구원인가 심판인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나약함과 단죄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가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한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이문열 『사람의 아들』


중학생 때 또래 남학생 사이에서 유행한 이론이 있다. '고들리 소로우(Godly Sorrow)'라는 이론인데 일단 직역하면 신의 슬픔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통용된 뜻은, 성경이 명시한 죄(혈기왕성한 시기인 만큼 보통은 자위행위인 경우가 많았다)를 저질렀을 때 신이 내리는 형벌이었다. 예를 들어 야한 생각을 하다 잠든 다음 날엔 꼭 점심시간에 식판을 엎거나, 운동장 주위를 서성이다 머리에 공을 맞는 등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꼭 지은 죄만큼의 형벌을 받는 듯했다. 나중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오히려 속죄를 받은 듯 마음이 후련해지기까지 했다. 물론 미신과도 같은 이론이었지만, 고들리 소로우를 몇 차례 경험하고 나니 범법과 처벌, 용서의 메커니즘을 자연스레 내재화하게 됐다. 이는 어른이 돼서도 술과 담배, 이성 등의 문제에서 동일하게 나를 옥죄었다. 회개하고, 똑같은 죄를 짓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됐다. 어쩌면 늘 가책에 시달리고 위축된 내 모습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에 짓눌려 만들어진 건지도 몰랐다.


민요섭의 소설 속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예수 앞에 나타나 나약한 인간을 변호한다. 당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왜 저 선악과를 먹는 죄로부터 시작해 수많은 죄목을 더하며 인간을 죄책감과 절망의 수렁으로 빠트렸는지. 당신의 가르침을 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왜 의인을 세우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는지. 그래 놓고 뻔뻔하게 공의의 망치를 들 자격이 있는지. 반복되는 회개와 일탈에 지쳐 신앙생활을 반쯤 포기한 내게 그의 변호는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정말 그랬다.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음란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이 두 뜰채만으로도 모든 인간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했을 때 선뜻 돌을 집어 드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인간은 나약하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죄책감과 지옥불의 공포를 심었고, 반대쪽에서 사랑과 용서의 신이 벌벌 떠는 우리를 다시 품었다. 태생적 나약함과 이에 대한 단죄, 처벌의 공포가 이 종교의 존속 방식이다.


만약 전쟁이 나면 적군을 총으로 쏴 죽여도 되나요? 종교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주로 묻는 질문이다. 평소에도 답이 궁금했지만, 아무도 명쾌하게 답해주지 않는 질문이기도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답을 찾았다. 요지는 살인은 원칙적으로 금지지만 전쟁이 났을 때는 예외다, 정도였다. 똑같은 살인이지만 상황에 따라 무엇은 죄가 되고, 무엇은 죄가 되지 않는다. 이 같은 사례는 우리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드는데, 죄란 처음부터 존재한 관념이 아닌 사회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라는 발생론적 관점이다. 작중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반문한다. "도대체 죄란 무엇이오? 그것은 말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관념일 뿐이지 않소? 선이 없으면 어떻게 악이 홀로 서 있겠으며 계율이 없는 곳에 어찌 죄만 홀로 있겠소? (...) 그래도 말씀은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홉 명의 죄인밖에 만들지 않았지만, 이제 당신은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흔아홉 명을 단죄하게 될 것이오." 나약함을 정죄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부당하지 않은가. 존재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질문을 던져볼 차례다.



땅 위에서 구하라


다시 말하거니와 너희는 지음 받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되었다. (...) 그날에는 부질없이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찾지 말아라.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너희를 낮추고서 우리를 높일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이문열 『사람의 아들』


구원의 문제는 대부분의 종교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사후세계를 다루기에, 구원의 교리가 얼마나 탄탄하고 설득력 있는지가 종교의 흥망을 좌우해 왔다. 종파를 구분하고 이단을 판별하는 근거도 구원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슬람은 선지자 무함마드를 구원자로 여기며, 천주교는 마리아의 구원을 믿는다. 주변에 흔한 인간을(심지어는 토종 한국인을) 구원자로 모신 종교도 있다.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른바 '이신칭의'의 교리다. 행위가 구원 여부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해석은 굉장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편의 강도(십자가의 못 박힌 예수의 오른편에 매달렸던 강도로, 마지막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처럼 최후의 순간에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건가.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며 사는 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음껏 즐기다 임종 때 '구원 티켓'을 얻는 인생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음모(?)를 품고 사는 인생 역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탕자의 비유가 떠올랐다. 아버지에게서 훔친 돈을 먼 타지에서 흥청망청 탕진할 때 탕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돈은 이내 떨어질 테고, 언젠가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게 되리란 걸 몰랐을까. 아니 아들의 그런 과오마저 용서하시리란 사실은 알지 않았을까. 자기를 종으로 받아달라 할 정도의 양심은 가진 탕자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돈은 아버지의 돈이었기에, 잘못과 뉘우침, 용서와 속죄라는 수동적인 서사 구조 속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을 테다. 아버지가 아닌 하늘의 구원만을 바라보는 사람 역시 같은 틀 속에 자신을 가두며 주체성을 잃는다. 인생을 천국의 선발캠프 정도로 여기는 이의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작중 민요섭이 고안해낸 신은 구원이든 용서든 땅 위에서 구하라고 말한다. 현생과 사후를 모두 하늘에 의탁하는 피조물에서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나라는 지시다.  『데미안』의 아브락사스처럼 선악의 틀을 부수고 판단하는 주체자로 바로 서라는 주문이다. 세상의 길과 신앙의 길. 어느 쪽이 됐든 내 선택이어야만 한다. 한치의 고민 없이 앞사람만 따라 걷는 이에게도 구원은 없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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