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해골물
어제도 평소처럼 분당으로 향하는 붉은색 광역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고지 부근 정류장에서 타기에 보통 승객은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네 번째 열, 안쪽 좌석, 머리 쿠션 위에 앉은 벌레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무슨 벌레인지는 잘 몰랐지만, 멀리서 봐도 사이즈는 거대했다. 아니, 이 분이 왜 여기에. 나중에 보니 버스 아저씨는 승객을 태운 뒤 꼭 오륙 초 뒤에 문을 닫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그때 이 불청객도 몸을 실은 게 틀림없었다. 다시 내릴까, 어정쩡하게 선 채로 깊은 번뇌에 빠졌다. 주말 동안 XXXX번 버스의 배차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15분이었다. 35도가 넘는 폭염 속으로 돌아가느니 벌레에 쏘이는 쪽이 더 나아 보였다. 일단 벌레를 관찰할 수 있고, 혹 돌진해오더라도 충분히 방어할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클리어 파일을 둘둘 말아 손에 쥐고 전투준비태세를 갖췄다. 그렇게 뒷좌석 벌레와의 불편한 여정이 시작됐다.
다행히 처음 세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엔 버스에 올라타는 승객이 없었다. 방지턱을 넘을 때 자세를 바꾼 점을 빼면 저 쪽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네 번째 정거장에서 네 팀의 손님이 버스에 올랐다. 뒤에서 들려올 비명소리를 기다리며, 클리어 파일을 바짝 쥐었다. 하지만 모든 승객이 타고, 버스가 출발하고, 오 초 뒤 문이 닫힐 때까지 벌레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흘끔 뒤를 돌아봤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었는데, 두 여자 손님이 문제의 좌석 바로 뒤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탄 학생은 바로 앞에,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직전에 탄 등산복 아저씨는 바로 옆에(!) 앉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셀카를 찍는 척하며 벌레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다행히 아까의 자세 그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내 눈에만 보이는 벌레인가, 혹시나 시트지에 묻은 얼룩을 헛것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의심이 됐다.
마침내 버스가 고속도로에 올랐다. 열댓 명의 승객 중 거대한 벌레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억울했다. 아무런 근심 없이 눈을 붙인 이들이 부러웠다. 곧장이라도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고 무거운 날갯짓으로 나를 향해 돌진하는 벌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원래는 짬을 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곤 했는데 내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벌레의 모습을 상상하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버스는 마침내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야탑역에 도착할 때까지 손님들이 더 오르내렸다. 다행히 벌레의 달콤한 낮잠을 방해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차 태그를 찍을 때 마지막으로 벌레가 앉은자리를 바라봤다. '부디 다른 승객들 헤치지 말고 종착지에서 얌전히 내리려무나...' 버스는 승객을 내리기 무섭게 다음 정류장을 향해 내달렸다. 일곱 명의 승객을 태운 채로.
애초에 이 모든 걸 알지 못했더라면. 책 읽고 글을 쓰며, 어쩌면 잠도 자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겠지. 하지만 나는 벌레의 위풍을 봐버렸고 그의 동태에 모든 정신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떠올랐다. 고통은 무언가는 아는 데서 온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먼저 알아도 도움되는 건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만 막상 벌레가 돌진한다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별다른 수 없이 똑같은 아비규환에 빠졌을 테지. 혹자는 안다고 달라지지 않는 일을 걱정하는 건 에너지 낭비라고 말하지만, 그건 거대 벌레를 보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정말이지, 모르는 게 약이다. 앞으론 필요 이상으로 주위를 둘러보지 말자 다짐하며 다시 한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