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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l 15. 2021

인프피의 사랑법

※ 주의: 매우 주관적, 과몰입, 성급한 일반화


내게도 엠비티아이(MBTI)를 혈액형론 정도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MBTI를 들이대는 사람들 덕에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피로가 축적돼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대로 검사를 받고 관련한 설명을 읽어본 뒤로 생각이 변했다. 통계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경계에 선 판별법이라고. 학창 시절 나는 엔팁(ENTP)이었지만, 요즘엔 인프피(INFP)만 나온다. '잔 다크르 형'이라 불리는 인프피에 대한 설명은 이미 다양한 플랫폼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그중 인프피들이 보통 MBTI에 진심이라는 설명이 특히 인상 깊다.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과몰입할 운명이었나 보다. (MBTI를 체계화하고 완성시킨 이사벨 브릭스도 인프피였다고 한다)


유튜브에 MBTI를 검색해보면 유형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유형 별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모아놓은 플레이리스트가 대표적이다. 보통 그런 영상의 정수는 그 아래 달린 댓글들에 있는데 인프피 플레이리스트의 댓글창을 보면 정말 인프피 유형의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인프피의 특징을 잘 드러낸 댓글일수록 '좋아요'를 많이 받았다. '나댔어야 할 때와 나대지 말았어야 할 때가 생각나 괴로워' '조용히 관심받고 싶어' '다가오지 마.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지도 마...' 요약하자면 인프피는 사람 대하는 걸 어려워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사람을 갈구하는, 겉으로는 유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폭풍이 몰아치는, 한없이 게으르지만 완벽을 추구하며 인정에 목말라 있는, 그런 유형이라 하겠다.


예전에 인프피들의 대인관계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어본 적 있다. '이들은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고 마음이 맞는 사람을 그 안으로 들인다' 애당초 타인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지만, 확실한 내 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 지으며 본인도 모르게 철벽을 치는 경우가 많다고, 그러나 연애를 시작하면 끝없는 불안의 연속이 된다고. 인프피들은 특유의 가정법으로 다양한 종말 시나리오를 그린다는데 정말 그렇다. 마치 '미리 상상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불안으로 불안을 덜어내려 한다. 인프피의 연애 양상이 인생의 일부가 아닌 전부처럼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만큼 상대는 부담을 느낀다. 불안은 집착으로 이어지며 이는 관계에 있어서 독이 되고 만다.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경험을 해봤다.


MBTI에 과몰입하지 말자는, 모래알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은 16가지로 구획될 수 없기에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말. 뻔하지만 그만큼 옳은 말이라 생각한다. 연인들 사이 큰 인기를 끈 MBTI 궁합도 마찬가지다. 당연하게도 이는 연애의 모든 양상을 담아낼 수 없으며, 따라서 이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건 어리석다. 모든 희로애락을 MBTI라는 색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순간, 연애는 저질적인 예정론으로 전락하고 만다. 무엇이든지 과하면 해롭다. MBTI도 타로나 사주팔자처럼, 하나의 즐거움으로 소비돼야 한다. 특히 연인의 관계에서 MBTI가 어떠한 언행의 당위가 되어서는 안 되며, 핑계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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