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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l 10. 2021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한 청년의 독선


오랜만에 H와 술을 마셨다. H는 동아리에서 만난 한 살 터울의 동생으로, 평소 바른 품성과 논리 정연한 생각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는 친구였다. 나도 그를 우러러보는 이들 중 하나였고. 지난해 봄,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H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남녀 성비가 1대 7을 밑도는 곳에서 몇 안 되는 남자 중 하나였고 나이가 한참 많은 편에 속했다. 교회 다니는 청년이 가뭄에 콩 나듯 한 대학 사회에서 모태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점도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일상의 대부분을 교회 공동체에 헌신할 정도로 종교에 열심이었고, 나는 한때 뜨거웠지만 이젠 그러한 열정이 식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모종의 동지애를 느낀 탓인지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신앙생활의 필요성과 어려움으로 회귀하곤 했다. 이날도 뻔한 근황을 주고받던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포문을 연 건 나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교회에 대한 비난이었다.


당시 H의 교회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를 존경해 마지않던 몇몇 동아리원이 그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가 실망하고 떠났다는 풍문이었다. 서른 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H가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지만, H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말은 더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비밀로 해달라는 동기의 부탁에 그동안 함구할 수밖에 없었으나, 술기운이 오르자 입은 헬륨을 마신 풍선처럼 가벼워졌다. "너희는 왜 예배드릴 때 마스크를 안 써?" H는 잠깐 당황한 눈치였지만, 어떻게 된 경위인지 알아챈 듯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에는 언짢았는데 나중엔 알겠더라고..." 평소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고 눈을 피했다. 그 뒤 요상한 교리 다툼이 벌어졌는데, 먼저 나는 자세한 교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을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장 1-2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의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장 25절


탄산이 다 빠진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로마서에 보면 모든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니 그들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나와 있잖아. 그렇다면 정부의 방역 지침도 잘 따라야 하지 않아? 마스크를 벗고 예배를 드리는 건 상관없어?" 내가 봐도 뼈아픈 지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엉뚱한 대답이었다. "물론 형 말도 맞는데, 성경엔 서로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하는 말씀도 있어. 그런 방역 지침들이 하나의 제약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일보단 수십 명의 청년이 모인 걸 더욱 의식하는 듯했다. 갑론을박은 이후로도 이어졌으나,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알코올이 뇌의 대부분을 잠식하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믿음과 종교에 대한 논쟁에는 승패가 없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그의 뒤에 아른거리는 독선의 빛이었다. 밝고 확신에 찬 기독교 청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수하지만 유해한 빛이었다.


photo by @thomasdajuu (pixabay)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장 31절


어떤 말씀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건 기독교가 이웃사랑의 종교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동등하게 중요시한다. 마가복음에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나와 있으며, 구약의 십계명은 이웃에게 해선 안 되는 행위를 나열하는데 절반을 할애한다. 마스크를 벗고 모여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분명 이 같은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 당장 중소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역 사회에 전파된 사례만 봐도 그렇다. '모이기를 힘쓰는' 기독교인의 독선으로 인해 믿음이 없는 이들마저 피해를 봐야 했다. 종교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품지 않았던 사람 중 이를 계기로 반감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웃에게 피해를 주도록 부추기는 종교는 존재의 목적과 생존하기 위한 수단을 모두 잃게 된다. H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비록 술김에 한 말이었지만, H의 주장에서 그동안 중소교회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감염이 끊이지 않은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핵심은 종교의 방어기제가 엉뚱한 곳에 작동한 것이었다. 정부가 국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내린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교회는 로마제국 시절로부터 이어져온 '종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라는 낡은 틀을 덧씌웠다. 외부 세력의 계도를 공격으로, 믿음을 시험하는 간사한 계교로 규정했다. 완벽한 방어기제였다. 이처럼 외부의 적을 정의하는 순간, 자신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 변모하게 된다. 종교는 다른 모든 인과를 집어던지고 오직 대의를 중심으로 갈등을 재편하도록 만들어 생존을 꾀한다. 또한 이러한 사고 체계는 외부와의 꾸준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한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폐쇄적인 중소교회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이 두려워 이토록 견고한 철옹성을 쌓는 걸까. 자금난 때문이다. 누구도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리지 않는데 어떻게 버티겠는가. 헌금을 받아야지. 결국 이들의 변명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난해하고 고상한 교리로 극복하려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면죄부를 판매하던 중세 교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나, 이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닌가.


마냥 정죄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개신교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연대해야 했다. 중소교회를 지원하며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해야 했다. 하지만 대형교회는 안을 보살피지 않고 밖으로 손을 뻗었다. 외면과 방치 속 잘못된 선택을 내린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H 역시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독선의 빛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돌아보게 됐다. 독선이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다른 독선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 마스크를 벗고 모이는 일이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H의 목소리만큼 그가 틀렸다고 비난하는 내 목소리도 높았다. 평소 '틀림이 아닌 다름'을 외치면서 H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건 위선이었다. 관용의 핵심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을 받아들임에 있다. 이번에도 남한테 관심 끄고 나부터 잘하자는 다짐으로 고민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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