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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l 11. 2021

이중 메시지와 편집증

보통의 아들이 되는 일


편집증(Paranoia)이란 상대방에게 적의가 숨어 있다고 판단하여 모든 언행을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증상이다. 대표적으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거나,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거나 감염시키려 한다고 믿는 등의 사례가 있다. 피해망상의 빈도가 매우 크며, 망상의 내용이 기이하지 않다는 점에서 조현증(정신분열증)과는 구별된다. 편집증 환자들은 불안 속에서 대상을 의심하고, 망상을 통해 의심의 증거를 찾는다. 어떤 대상이든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자기 방식대로 현실을 해석하기 때문에 치료자마저도 못 믿는 경우가 많다. 편집증의 유형은 다양한데,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과대형, 색정형, 질투형, 피해형, 신체형, 혼재형이다. 이중 피해형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이용당하거나 속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유형이다. 쉽게 타인을 의심하며 원망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동귀, 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 심리 편)


photo by @philkz (pixabay)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 좋은 점은, 그동안 비합리적이고 부끄럽게 여겨온 생각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와 정신분석학적으로 멋들어진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경우, 이해로부터 내면의 변화가 촉발되기 때문이다. 내가 별난 건 아니구나, 라는 묘한 안도감도 얻을 수 있다. 마음의 작동 방식은 복잡다단하며 결코 한두 가지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명쾌한 정답은 없다는 말이다. 상담사도 상담의 목적이 왜곡되지 않은 거울로 온전히 자신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라 했다. 최근 며칠간의 상담 끝에 그동안 엄마의 의도를 의심하고 불안해 한 건 모두 편집증적인 망상에서 비롯됐으며 이는 이중 메시지(Double Message)를 이용해 자녀를 통제한 잘못된 양육 방식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왜곡된 거울을 닦아내는 과정을 통해 보통의 아들이 될 수 있길 바랐다. 엄마의 행복이자 자랑이 되곤 하는 그런 아들이.


이중 메시지 혹은 이중 구속(Double Bind)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속마음이 다르다는 걸 대상한테 알려 양심의 가책이나 책임 부담 없이 그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하는 심리 기술을 뜻한다. 가령 PC방에 다녀와도 되냐고 허락을 받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마음대로 하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신나게 게임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다녀오니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 엄마의 표정도 차갑고 밥도 차갑다. '내가 PC방에 다녀와서 이렇게 됐구나'라는 걸 직감한 당신은 앞으로는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을 통제하게 된다. 이중 메시지는 위험하다. 이중 메시지를 받는 사람을 철저한 자기 검열과 통제 속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가스 라이팅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끼는 이유다. 엄마가 차라리 "안돼"라고 말했다면 잠깐 은은 원망의 대상이 됐겠지만 두고두고 한 사람의 정신 체계를 의심과 망상의 늪 속에 빠트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여러 기억을 떠올리게 됐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이 많은 어딘가에서 동생과 실컷 뛰어놀다가 중간중간 엄마의 표정을 살핀 기억이었다. 집 밖에서 부모님은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타면 늘 돌변했다.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니, 왜 부모를 그렇게 부끄럽게 하니. 동생과 나는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곱씹으며 다가올 형벌에 벌벌 떨었다. 이중 메시지의 또 다른 사례는 이웃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는데, 엄마가 내 입가에 짜장이 묻었다며 볼을 세차게 꼬집었다.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만큼 세차게. 입 좀 다물라는 뜻이었고, 이중 메시지였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거울로 입 주변을 살폈지만 짜장 자국은 없었다. 그때의 설움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이중 메시지에 시달리다 보니, 자연히 엄마의 속마음 혹은 숨겨진 의도가 무엇일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아들이 돼버린 건 아닐까. 오늘날 엄마를 향한 편집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을 나는 이렇게 진단한다. 이제는 엄마도 미숙함을 던지고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있지만 내 안에 굳어진 불안과 의심의 메커니즘은 곧잘 부서지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의심들과 그에 따른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비합리적으로 여겨지더라도 당장엔 어쩔 도리가 없다. 엄마가 이런 말(또는 행동)을 하는 건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야, 엄마는 당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어. 의심으로 감옥을 세우고 답답함을 느낀다. 이런 답답함을 다시 분노의 형태로 엄마에게 표출한다. 지금까지도 엄마와의 관계가 평행선을 달리는 건 좁힐 수 없는 잘못과 용서의 시차 때문이다. 푸른 멍은 남았는데, 원망할 대상은 오래전 사라져 버렸다.


몇 달 전 영화 '런(2020)'을 봤다. 장애를 가진 딸이 우연히 엄마의 일그러진 사랑과 은연중에 받아온 폭력을 알게 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 영화다. 영화 속 딸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에서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 선량한 엄마에게 편집증적인 생각들을 덧씌우며 쌓아온 죄책감이 잠시나마 녹아내리는 듯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든 허무함은 현실의 상황이 결코 이 같은 권선징악의 프레임 속에 편입될 수 없다는 절망을 만나 증폭됐다. 엄마는 가해자가 아니니까, 극복의 과정은 지루한 반성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어린 내 마음속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단한 매듭을 묶고 떠났으며, 나만이 발이 묶인 채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어른이 된 이젠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단박에 매듭을 잘라낼 이는 심리상담사도, 다른 어떤 전문가도 아닌 오직 나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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