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Aug 23. 2021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평화주의 탈출기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늘 평화를 바라왔다. 남들과 나 사이의 평화는 물론 남들 간의 평화도 중요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화를 내지 않고 짜증이 나더라도 속으로 삭히면 됐다. 어떤 일에서든 내 잘못을 먼저 찾아내어 용서를 구하면 됐다. 남들을 위해 내 이익을 포기하고 그 사실을 잘 포장해 보여주면 됐다. 그러면 사람들은 안 좋은 마음을 거뒀고 도리어 고마움을 전해왔다. 집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면 그렇게 공동체의 평화도 이룩할 수 있었다. 한때는 내가 지독한 평화주의자라는 걸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갈등이 생기면 하루 종일 그 갈등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평화가 만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는 중이다. 그 배경에는 아르바이트와 학보사에서의 깨달음이 존재했다.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할 때 괴로운 점들 중 하나는 업무 분담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손님이 나갈 때 결제하고, 다 먹은 자리를 치우고, 다시 세팅하는 일을 누가 할지 즉흥적으로 정하다 보니 눈치 싸움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다행히 같이 일하게 된 점심타임 서빙조는 먼저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성실한 멤버로 구성돼 있어, 눈에 띌 정도로 업무량에 차이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사소한 일에서, 이를테면 손님이 일어날 때 자리를 치울지 결제를 할지 정하는 일에서 갈등이 생길 여지는 충분했다. 실제로 며칠 전 저녁타임 서빙조에서 한 아르바이트 직원이 '맨날 나만 이층으로 치우러 올라간다'며 역정을 낸 뒤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나는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원칙을 세웠다. '손님들이 일어나면 자리를 먼저 치우러 간다'는 원칙을. 그렇게 남은 갈등의 싹을 자르자, 전례 없는(오래 일한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평화를 지속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날에 홀로 여러 자리를 치우고 있자면 마음은 금방 피폐해졌다. 평화는 일방적인 희생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었다.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동안 3명의 학보원이 중도 퇴사했다. 각자 그럴듯한 사정이 있었지만, 자신의 도면이 고스란히 남은 이들의 부담이 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선택은 무책임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름다운 이별을 택했다. 처음 L이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홀로 3만 원이 넘는 케이크를 주문해 환송식을 열어주었다. 또한 중도 퇴사할 경우 졸업증명서에 경력사항 기재가 취소되는 불이익을 받아야 했지만 그동안의 노력을 참작해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편집국장의 재량으로 넘어가 수 있는 일종의 관습과도 같은 특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학금을 반납하는 과정에서 L의 퇴기를 학교에 알려야 하는 상황이 됐고, 이로 인해 약속했던 특혜를 줄 수 없게 됐다. 나는 원칙대로 할 수밖에 없으며 혼란을 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L은 수긍하지 않았다. 장학금은 반납할 수 있어도 경력은 포기할 수 없다고. 평소 학점과 스펙에 목숨을 걸었던 L이었기에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미 학교의 소관으로 넘어간 일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L은 마치 내가 일처리를 제대로 못한냥 몰아붙였다. 나중에는 L의 어머니가 학교 부처로 전화해 따졌다는 후문까지 들려왔다.


아르바이트와 학보사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사람마다 양심의 크기가 다르며 이로 인해 남을 배려하는 능력 역시 달라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해 누군가는 알게 모르게 감정을 착취당하며 마음이 피폐해지게 된다. 평소에 착하다, 마음이 넓다, 평화주의자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면 당신도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한 희생이, 당신이 원하는 평판과 인정을 가져다준다면 문제없다. 따지고 보면 그런 희생적인 태도도 남들한테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포장한 일에 지나지 않으니. 하지만 인간이란 본래 남한테서 무엇을 받았는지는 금방 잊는 존재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영화의 명대사처럼, 어떤 희생도 결국에는 당연시되기 마련이다. 굳이 아낌없이 나눠주다 밑동만 남아버린 측은한 나무의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가정의 화목을 지탱하는 건 한 사람의(보통은 어머니의) 당연시되는 희생인 걸 보면 말이다. 그런 종류의 평화는 희생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때 흔들린다. 무정한 적응의 동물들 사이에서 중요한 건 동등한 위치를 선점하는 일이다. 일방적인 희생은 어리석다.


평화는 분명 다수의 행복을 위한 길이며, 평화주의는 모두가 지향해 마땅한 대인관계법이다. 하지만 평화를 이루는 일이 현명한 판단이나 호혜적인 공생이 아닌 제 자신을 희생하는 일에서 비롯된다면 그 평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애초에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에서의 평화를 평화라 말할 수 있을까. 호구라는 표현이 알맞지 않을까. 자기착취적인 평화는 결국 더 큰 갈등으로 이어지며 그때 터져 나오는 분노는 공든 탑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하다. 돈, 시간, 감정, 에너지만 낭비한 채 '알고 보니 별로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잠언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들 중 마음을 지키라 말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난다고. 생명의 근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일상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는 건 맞다. 대인관계, 업무성과, 동기부여 등등. 따지고 보면 인생사 대부분이 마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가. 그러니 이제는 평화주의를 벗어던져야 하며, 눈앞의 공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 역시 그만두어야 한다. 이타도 이기도 금방 잊히고 마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오로지 제 마음을 지키는 일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건비 최적화 게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