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결국 우리는 많은 노동 인구들을 놀게 만든다. 그들의 무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으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대표작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현대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담긴 열댓 편의 에세이로 구성돼 있다. 이중에서도 맨 처음 실린 동명의 에세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현대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모를 냉철하게 뜯어 분석한 역작으로 꼽힌다. 러셀의 주장은 이렇다. 현대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유한계급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여가를 분배해야 한다. 더 이상 근로가 미덕이라는 말에 속아서 안 된다. 90년 전의 글인데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비춰봤을 때 뒤떨어진 구석이 없었다. 우린 여전히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쪽에겐 굶주림을' 주고 있으니.
"세 명이서 해도 되는데?"
수도권 거리두기 단계가 오르면 손님이 줄어들 거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 동네 사람들은 뉴스를 안 보나, 의심될 정도로 매장은 4차 대유행 이전과 같이 북새통을 이뤘다. 2인 이상 집합금지도 6시 이후부터 적용되기에 런치 타임 매출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3-4인 약속이 점심으로 몰리는 바람에 매출이 늘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홀서빙 종업원이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인건비를 관리하는 점장님과 대표가 줄어들 매출에 대비해 인원을 최적화한 것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그들의 예상이 적중해, 한 명이 빠져야 수지가 맞았다. 그렇다면 매출이 이전 수준을 회복했을 땐 인원도 복구해야 앞뒤가 맞지 않은가. 세 명이서도 충분히 돌아가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렇듯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격상이나 최저시급을 인상에 따른 '인건비 최적화 게임'의 희생양은 늘 말단 아르바이트 직원들이었다.
단순히 일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편하자고 하면 나머지 두 명이 힘들어지기에, 부족한 인력을 핑계로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한 테이블이 끝나면 땀 닦을새 없이 다음 테이블을 정리하러 가야 했고, 뜨거워도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1층과 2층을 아슬아슬하게 오가야 했다. 이러다 다치겠다, 싶은 아찔한 순간이 하루에도 네댓 번씩 찾아왔다. 이미 내가 일하기 전후로 네 명의 직원이 부상을 당해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그중 절반은 다친 뒤에도 퇴근을 못해 병세가 악화됐다고 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홀과 주방을 보고 있자면, 아주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들이 떠오른다.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톱니바퀴들이. 다리에 뜨거운 기름을 쏟아도, 발목을 접질려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원 수를 최적화하려는 셈법은 돈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안전하게 일할, 안전하게 치료받을 권리도 모두 포함돼야 한다. 가끔씩 빈둥빈둥 서 있는 직원을 보는 게 애가 탈지라도 말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인건비 최적화 게임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매장도 이로 인해 피해를 입기에 승자는 없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왜들 이렇게 불친절할까, 놀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나도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게 됐다. 문제는 책에서 러셀도 지적한 바, 편안함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손님들을 받을 땐 최대한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주문을 받지만,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면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만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아끼려 행동이 간결해지는데, 이 모습이 아주 불친절해 보인다. 욱하는 마음도 커진다. 어제는 한 아줌마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이리 와, 이거, 치워줘, 를 명령하길래 짜증 가득한 얼굴과 큰 목소리로 '치워드릴까요?'를 외쳤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선한 본성의 발현도 얼마 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감정 노동도 육체 노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간은 기계와 다르다.
결국 전례 없는 매출을 찍은 날(보통 4명이서 170만 원 올리기도 힘든데, 이날은 3명이서 190만 원을 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대충 이유를 둘러댔지만, 점점 감당할 수 없어지는 업무량 때문이라는 걸 나도 알고 점장님도 알았다. 좀 더 캐물었으면 솔직하게 답했을 테고, 세 명이서도 잘만 돌아가지 않냐는 답을 들었을 테다. 물론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두 명이서 하더라도 돌아가긴 했을 테다. 하지만 그만큼 몸과 마음에 생채기가 날 위험은 많아지며, 그 리스크는 대부분 아르바이트 직원이 떠안게 된다. 따라서 모든 점장과 점주들에게 바란다. '빼보니 되더라'는 식의 한계실험을 멈춰야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쓰러져도 다시 세울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