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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Dec 17. 2021

흑백과 회색의 브런치

테리의 브런치, 왜 흑백인가


"흑백인 거 말곤 별거 없는데"


내 브런치를 쓱 훑어본 지인이 남긴 말이다. 당시의 목소리 톤과 표정까지도 뇌리에 선명히 남은 걸 보니 그 말이 어지간히도 상처였나 보다. 마음은 아프지만 부인할 수 없다. 멋들어진 분위기에 비해 알맹이는 턱없다는 걸 나도 매번 느낀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뭔가 있어 보이려는 분위기 때문에 흑백으로 꾸민 건 아니다. 나름의 이유들이 있는데,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브런치를 시작한 순간부터 흑백만을 고집했다. 타이틀 사진은 무조건 흑백으로 했고, 본문에 올리는 사진도 한두 편을 빼고는 모두 흑백으로 했다. 원하는 흑백 사진이 없으면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이런 똥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세 가지다.


① 배치에 대한 고민을 줄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강박증을 앓았다. 강박증이라 하면 집에 가스불을 켜 두고 왔나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그건 많은 종류 중 하나일 뿐이다. 나를 괴롭히는 강박 증상은 '균형 강박'으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나 패턴을 참아내지 못하는 성향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강박이 생겨나는지도 알 수 없고,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도 제멋대로다. 다만 그런 강박은 규칙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며, 규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엔 긁을 수 없는 곳이 간지러운 듯 고통스럽다는 건 잘 안다. 연속되는 문장, 사진을 볼 때 어떤 규칙이 만들어지고, 그규칙을 따르는 데 많은 에너지를 허비한다. 메인 이미지를 모두 흑백으로 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했을 때 피드의 색 배치를 어떻게 하냐를 두고도 규칙이 만들어졌다. 특정색이 반복돼서도 안 됐고, 눈에 튀는 색이 있어서도 안 됐다. 보색(補色)이 한데 붙어있는 경우에도 참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메인 사진을 고르는 일만 해도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어쩌다 하나를 바꾸게 되면 그 주변을, 결국에는 피드 전체를 갈아엎게 됐다. (인스타그램을 안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런치로 넘어올 땐, 흑백 사진만 사용하기로 정했다. 강박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멋을 부리는 걸로 오해받을 때 굉장히 억울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② 텍스트 흡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메인 이미지만 흑백으로 고집하는 건 아니다. 본문 이미지는 물론 텍스트도 흑백으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브런치를 둘러보다 보면, 종종 다양한 글자색을 사용한 글을 만난다. 잘못된 건 아니지만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이를테면 중심 문장에 글자색을 넣으면 금방금방 눈에 띈다. 하지만 핵심을 먼저 봐버리는 만큼, 나머지 문장을 진득하게 읽는 일에 인색해지게 된다. 따라서 글자색을 넣는 건 정보를 전달하는 글(비문학)이나 무언가를 추천하는 글(서평)에 잘 어울리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반면 차분한 논리 전개가 주가 되는 글(칼럼, 에세이)은 문장력과 글의 구성으로 흡인력을 높이는 게 관건이다. 글자색을 사용하는 순간, 치밀한 구성과 탄탄한 전개는 힘을 잃게 된다. 글자색뿐만 아니라 이미지도 주의하려고 하는 편인데, 아예 이미지를 안 넣은 글이 더 많다. 다른 곳에 먼저 눈이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며, 그렇기에 첫 문장부터 독자를 빨아들이는 글을 써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③ 흑과 백, 회색이 전하는 메시지

나는 안티에그라는 문화예술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맡은 코너는 '그레이(Gray)'라는 코너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안들에 대해 약간은 비뚤어진 질문을 던지면서 독자들 사이에 담론을 형성하는 목적을 가진 코너다. 흑과 백, 찬성과 반대 또는 정답과 오답으로 뚜렷하게 양분된 사안에 중간지대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름이 그레이(회색)다. 그렇다면 내 브런치에서 회색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까. 그동안 써온 글을 찬찬히 돌아봤다. 마음에 드는 글도 더러 있으나, 논리적으로 부실하면서도 단정적인 글들이 눈에 많이 뵌다. 흑인지 백인지를 정해두고 설교하는 듯한 글들을 보니 부끄럽다. 다만 위안으로 삼는 건, 비록 졸고라 할지라도 한편 한편 써내는 일에 무수한 고민을 담았다는 점이다. 잘못된 판단도 많았지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고민하며, 그만큼 성장했다고 느낀다. 흑백은 양분된 세계를, 회색은 그 사이에서의 고민을 의미한다. 앞으로도 내 브런치가 회색의 브런치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흑백인 거 말곤 별거 없는데"


여전히 맞는 말이다. 더 좋은 글을 내기 위해 분투하는데도 늘 고만고만한 글을 내는 듯해 괴롭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건 사람들에게 단순한 겉치레로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입이 근지러웠다. 마침 백 편의 글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이면의 고민을 털어놔 봤다. 속이 후련하다. '흑백인 거 말고도 별거 있는' 브런치가 될 수 있도록 정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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