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Dec 16. 2021

부서진 뗏목을 타고

어떻게든 나아가는 삶


한 학기만에 물리학도가 된 걸 후회했다. 대학에서 배우는 물리는 내가 상상했던 바와 정반대였다. 책임은 재수학원에서 만난, 머리가 하얗게 센 노교사에게 있었다. 그는 물리가 실로 재미난 학문이며, 대단한 역동성을 품고 있다며 수강생들의 마음을 부풀렸다. 그런 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 선생의 물리 수업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입시 생활에 있어 한줄기 빛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분필을 던져가며 운동을 설명하고, 유체역학을 동원해 명량대첩을 생동감 있게 풀어내고, 갈릴레이가 실은 원자론을 주창했다는 흥미로운 음모론을 속삭이며 우리를 현혹했다. 나를 포함해 뚜렷한 꿈이 없던 재수생 여럿이 그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도가 됐다는 풍문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열어보니 재밌는 부분은 그게 전부였다. 예고편이 전부인 영화였다.


물리학자가 될 재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바꿀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공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기 위해 복수전공을 신청하는 일 정도. 그렇게 사회학 과목을 여럿 들어봤으나, 이내 흥미를 잃고 휴학을 해버렸다. 지도교수는 2보 전진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흔쾌히 중도 휴학을 승인했다. 방학까지 합쳐 넉 달의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 동안 밀린 공부를 완벽하게 따라잡겠다고 다짐했다. 처음부터 기초를 다져 물리학에 통달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꿨다. 대학교 1학년 때 쓰던 일반물리학 교재를 펼쳤고, 대학생을 위한 비싼 인터넷 강의를 결제했다. 하지만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그 방대한 양을 네 달만에 공부하기란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전략을 바꿔야 했다.


답은 명확했으나, 마음속으로 결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전공잔데 물리학을 잘해야 하지 않을까' '아예 일 년을 더 쉬면서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이룰 수 없는 완벽을 바라고 있었다. 일 년간의 반수를 통해 역전 홈런을 친 일을 되뇌며, 다시 한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의 암울한 상황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겠다. 나는 이쪽 섬에서 저쪽 섬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뱃사람이다. 남들이 열심히 배를 만들 때 나는 내 능력을 자신하며 빈둥댔다. '예전에 만들어봤는데 별거 없더라. 나중에 해도 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어 섬을 떠났다. 누군가는 함선을, 누군가는 허름한 목선을 만들어 어쨌든 바다로 나아갔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됐다. 방주를 만들 준비를 했다.


배를 만드는 솜씨가 예전 같지 않았다. 나이가 들며 근력이 쇠하고, 머리가 굳었다. 튼튼한 배를 만들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번만 잘 만들면 다음 섬을 넘어 그다음 섬으로, 어쩌면 그다음 섬까지도 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한 배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고작 나무 몇 개만 덧대놓은 채 세월을 허비했다. 먼저 떠난 배들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덜컥 다급해졌다. '이대로 영영 섬에서 못 빠져나가면 어떡하지.' 이제라도 결단을 해야 했다. 다 부서져가는 나무라도 엮어 뗏목을 띄우고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했다. 얼기설기 나무를 엮었다. 배라고 하기 민망한 걸 물에 띄웠다. 후회가 됐다. 왜 미리 준비하지 않았을까. 왜 완벽에만 집착하며 허송세월을 했을까. 한참 늦은 후회였다.


인터넷 강의를 모두 환불했다. 학교 커뮤니티에서 남은 전공과목들의 족보(시험 기출)를 다운 받았다. 더는 이해하려 들지 않겠다, 몽땅 외워버리겠다, 허름한 뗏목을 물에 띄웠다. 낮은 학점을 만회하겠다는 욕심도 내려놓겠다, 어떻게든 내년 안으로 졸업을 하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그런데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아직도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완벽을 꿈꾸고 있었다. 완전한 구제불능. 왜 이런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다주간의 심리 상담을 받으며 내린 결론은, 오은영 박사 칼럼에서도 본 내용인데, 불안 때문이었다. 내 경우, 불안의 원인은 두 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사랑이 옮겨간 탓이었고. 완벽한 배를 만들려한 건 난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유년시절에서 비롯된 불안과 애착 때문이었다는 뜻이다. (이전 글 참고)


며칠째 싱숭한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브런치에 끄적이고 있다. 비유(모난돌, 내적망명, 뗏목)만 바꿔가며 매번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 독자들에게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맨날 하는 고민이 이뿐인 걸. 다만 무인도 한 모퉁이에 '누구누구 다녀감' 표시를 남기는 일과 비슷한 목적으로 쓴 글이라면 용서해주려나. 나중에 이곳에 갇히게 될 사람들에게 '당신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려는 목적 말이다. (물론 그 옆에 백골 사체가 놓여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땐 글을 지워야겠다)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부서진 뗏목을 고쳐 어떻게든 나아가는 게 인생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노를 더 바짝 움켜쥐었다.


작가의 이전글 낡은 서랍 속의 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