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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Dec 15. 2021

낡은 서랍 속의 바다

한때 누구나 품었던 그 바다


이적이라는 가수를 좋아한다. 노래할 때 목소리 톤이 비슷해서는 아니고,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닮아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를 좋아하게 된 건 그의 노래 가사가 지닌 깊이 때문이었다. 그는 젊은 날의 후회와 좌절을 노래할 줄 아는 알았다. 그러면서 그 끝에 작은 희망을 덧붙일 줄도 알았다. 잔잔한 목소리로 그려낸 장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랜 여운을 남겼다. 그 안에 담긴 삶과 감정의 폭이 무척이나 넓었기에, 누구라도 당장 그 안에 자신을 대입하며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이적은 음악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젊은 시절, 패닉이라는 이름으로 낸 음악들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는 여전히 내 플레이리스트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아래는 그 가사다.


내 바닷속에는 깊은 슬픔과 헛된 고민들 회오리치네. 그 바다 위에선 불어닥치는 세상의 추위 내 마음을 얼게 해. 때론 홀로 울기도 지칠 때, 두 눈 감고 짐짓 잠이 들면. 나의 바다 그 고요한 곳에 무겁게 내려가 나를 바라보네.

난 이리 어리석은가. 한 치도 자라지 않았나. 그 어린 날의 웃음을 잃어만 갔던가. 초라한 나의 세상에 폐허로 남은 추억들도 나 버릴 수는 없었던 내 삶의 일부인가.

나 어릴 적 끝도 없이 가다 지쳐버려 무릎 꿇어버린 바다. 옛날 너무나도 고운 모래 파다 이젠 모래 위에 깊은 상처 하나. 행복하고 사랑했던 그대와 나 생각만으로 웃음 짓던 꿈도 많아. 그런 모든 것들 저 큰 파도에 몸을 맡겨. 어딘가 가더니 이젠 돌아오지 않아.

바다 앞에 내 자신이 너무 작아. 흐르는 눈물 두 손 주먹 쥐고 닦아. 많은 꿈을 꾸었는데 이젠 차마. 날 보기가 두려워서 그냥 참아. 그때 내가 바라보던 것들 아마.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을 감아. 나의 낡은 서랍 속의 깊은 바다. 이젠 두 눈 감고 다시 한번 닫아.


우리는 어른이 되며 마음속에 서랍을 만들었다. 젊고 철없던 날의 기억을 그곳에 담았다. 그곳은 깊은 슬픔과 헛된 고민들이 회오리치는 바다였다. 불확실하지만, 무궁무진한 바다. 하지만 그 바다에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어른들은 바다를 떠나 확실하게 다져진 땅에 올라서야 한다고 말했다. 바다 위로는 세상의 매서운 추위가 불어닥쳤다. 순수하고 따듯했던 마음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서랍을 닫았다. 바다를 잊고 바쁜 매일을 살았다. 서랍은 세월의 습기를 잔뜩 머금으며 낡아갔다. 뭍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고운 모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한 바닥을 드러냈다. 발과 무릎에 많은 상처가 났다. 그러다 홀로 울기도 지친 날들이 찾아왔다. 다시 서랍 앞에 섰다. 천천히 손잡이를 당기고 바다로 내려갔다. 눈앞에 수평선이 아득한 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 앞에 선 나 자신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한때 내가 품었던 바다였지만 이젠 발도 담글 수 없었다. 행복하고 사랑했던 그때의 나, 생각만으로 웃음 짓던 꿈으로 가득했던 나. 그 모습을 다시 보기가 두려웠다. 큰 파도가 칠 때마다 이루지 못하고 미뤄둔 꿈들이 떠올랐다. 설레다가도, 후회가 밀려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바다를 떠난 순간부터 나는 한 치도 자라지 않았다. 다만 그 어린 날의 웃음을 잃었을 뿐이다. 다만 초라한 세상 속에서 폐허로만 남은 추억을 얻었을 뿐이다. 이젠 그 폐허들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했다. 부끄럽지만, 인생이었다.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여전히 같은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등을 돌렸다. 다시 한번 두 눈을 감고 서랍을 닫았다.


photo by pixabay


이적은 스물네 살에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를 불렀다. 무엇이 그렇게 후회되고, 무엇이 그렇게 슬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때에는 서랍이 그리 낡지도 않았을 성싶다. 다만 그 이후에 펼쳐진 인생 내력을 봤을 때, 그가 다시 서랍 앞에 섰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는 이미 큰 파도 속에 묻어두었던 꿈을 이뤘다. 바다 앞에서 눈물을 훔치던 청년도 함께 사라졌다. 더 이상 젊은 날의 후회와 좌절, 희망을 담은 노래를 들을 수 없어 아쉽다. 대신 그로부터 2년 전 발매된 노래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똑같이 바다가 등장해 그 속편처럼 들리기도 하는 노래다. '달팽이'의 후렴부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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