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앗아간 일상의 리듬
인생에도 리듬이 있다. 흔히 습관 또는 버릇이라 불리는 건데, 꼭 하루 단위로 반복되는 일과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리듬의 주기는 한 주가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으며, 꼭 일 년마다 되풀이되는 루틴도 있다. 가령 벚꽃이 피는 시즌이 오면 헬스장을 끊는다던가, 연말이 되면 술이 당긴다던가, 하는. 리듬은 삶에 안정감을 준다. 이전부터 해왔고, 앞으로도 똑같이 할 일이 있다는 건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의지할 만한, 든든한 닻이 된다. 또한 리듬은 성장의 발판이 돼준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해낼 끈기가 없다. 인간은 무의식적인 반복을 통해 성장하며, 그런 반복이 이뤄지도록 하는 게 리듬이다.
루틴한 편은 아니지만, 내 인생에도 나름의 리듬이 있었다. 그 리듬에 맞춰 쌓아가던 일들이 있었다. 매주 두 번씩 테니스 레슨을 받고 있었고, 매거진에 매달 한두 편의 원고를 기고하고 있었다. 브런치 업로드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리듬이 한순간에 파괴되는 일이 생겼으니, 그만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일이었다. 대체 어디서 걸린 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일어난 일이었고, 그걸 알아낸다 한들 한 주간 은둔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장장 8일의 은둔생활이 시작됐다. 먹고 쌀 때를 빼면 주구장창 누워서 유튜브만 봤다. 휴식은 달콤했으나, 그때는 리듬을 잃은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다.
마침내 이불 밖으로 나온 뒤에야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됐다. 테니스 레슨을 받는데 아무리 자세를 잘 잡아도 공이 원하는 곳에 맞지 않았다. 코치님이 공을 넘겨줄 때도 한 박자씩 느리게 라켓을 휘두르는 바람에 놓치는 일이 허다했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빨라진 기분이었다. 매거진 일도 잘 안 풀리긴 마찬가지였다. 며칠씩이나 공을 들였는데도 처참한 수준의 원고가 나왔다. 이대로 냈다간 매거진에 큰 손해만 안기겠다는 생각에 발행 철회를 요청했다. 브런치 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씩 퇴고를 한 뒤에도 좀처럼 발행 버튼에 손이 안 갔다. 일상의 리듬이 파괴되자 후유증이 뒤따랐다. 아주 지독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예전에도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지만, 이번엔 충격이 더 컸다. 내 삶의 한가운데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여겼던 일들이 고작 일주일 쉬었다고 무너졌으니, 그럴 수밖에. 분명 하던 대로 했는데 결과는 나오던 대로 나오지 않았다. 답답했다. 너무나도 중요하고, 늘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모든 방면으로 퍼포먼스가 악화되자,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울적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또다시 무기력과 우울의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살다 보면 슬럼프는 몇 번이고 다시 올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휘둘릴 텐가. 벗어나는 방법을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무언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만 슬럼프가 온다는 말은 이제 진부했다. 그런 말은 잠깐 마음을 편하게 할 뿐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진 않았다. 더 냉철하게 문제를 진단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슬럼프가 왔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퍼포먼스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왜 낮아졌는가. 일주일 내내 이불속에 틀어박혀 지내며 몸이 굳은 탓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진 상태로 전과 같이 노력하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가. 당연히 아니다. 같은 성과를 내려면 굳었던 몸이 풀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슬럼프는 이런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온 건지도 몰랐다. 어쪄먼 그런 교만한 마음이 슬럼프의 본질인지도 몰랐다.
슬럼프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였다. 몸이 다시 리듬에 적응하도록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럼프가 왔다고 한탄하며 노력하기를 멈춘다. 진정한 슬럼프는 이때 시작된다. 반면 마음을 달리 먹고 다시 차근차근 노력하는 이들에게 슬럼프는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다. 관성에서 벗어나 잘못된 버릇을 고치고, 차분히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하며 성장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다. 테니스와 매거진, 브런치 등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난 뒤, 그동안의 성과를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장단점들이 있었다. 당분간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차분히 다음 도약을 준비해보자고, 다짐했다.
토목학 용어에서 슬럼프는 굳기 전의 시멘트 반죽을 의미한다. 시멘트 반죽이 굳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어떻게 반죽을 굳히냐에 따라 이후의 용도가 달라진다. 두 단어가 같은 게 그리 대수는 아닐지라도 그 안에 담긴 통찰은 결코 작지 않다. 슬럼프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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