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May 30. 2022

유주얼 서스펙트

익명과 누명 그리고 오명


#1 익명설문

훈련소에서의 일이다. 동기 중 하나가 간부한테 불려갔다. 그가 자살 위험군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면담이었다. 그가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된 건 익명설문에서 '주변에 자살 생각을 하는 동기가 있냐'는 질문에 누군가 그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자살'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는 게 제보의 근거였다. 동기가 그 단어를 많이 쓴 건 맞지만, 그게 관용적 표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답답한 상황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암 걸린다'라고 말하듯, 힘든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단어를 쓴 것이었다. 그 표현이 윤리적으로 옳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여기서의 핵심은 그가 자살 위험군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떤 새끼가 찔렀냐"


황금 같은 휴식시간에 면담을 받고 온 동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동기들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방 내부는 평상이 마주 보는 구조로 돼 있었다. 평상당 여덟 명씩, 열다섯 명 중 범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만큼 문제는 없겠거니 했다. 먼저 용의자 목록에서 제외된 건 평소 그와 같이 다니는 패거리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쌓아 올린 우정과 의리는 단단했다. 그들 다음으로 입담이 좋은 놈, 과묵하지만 쎄 보이는 놈, 평소 똑같이 그런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놈이 차례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고 나니 네댓 명 정도가 남았다. 나도 포함돼 있었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범인으로 지목됐는지 알 수 없다. 작은 의심들이 모여 정황상의 증거가 되고, 정황상의 증거들이 모여 확실한 증거가 된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심증도 수가 많으면 물증이 된다고. 범인 물색이 한창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침구를 정리하다 동기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나는 날카로운 눈매가 무서웠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나 잘못 보였다간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행동이 되려 의심을 산 게 틀림없었다. 눈을 피한 뒤에도 한동안 따가운 시선이 내리 꽂혔다. 모포를 정리하는 내 손이 부자연스러웠다.


훈련소에서 내가 유일하게 성경을 읽었다는 점도 정황상의 (어쩌면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게 분명했다. 기독교인들에게 흔한 도덕기준과 오지랖이 내게도 있고, 그게 제보로 이어졌다고 가정하면 매끄러운 서사가 완성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기와 그 패거리들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게 보였다. 꼭 뭉쳐 다니지는 않더라도, 어쩌다 붙게 될 땐 농담도 주고받던 사인데 분위기가 급변했다. 항변의 기회라도 주어졌으면 했으나, 대놓고 나를 지목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익명설문은 누명을 낳았고, 지워낼 수 없는 오명으로 이어졌다.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날까지 보름여의 시간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2 N번방

대학 학보사 회의는 신촌의 한 스터디룸에서 진행됐다. 수습기자로 뽑힌 뒤 참여하는 첫 편집회의였다. 대충 어떻게 회의가 진행되는지 파악하는 자리였고, 따라서 우리는 부담 없이 선배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편집국장의 환영사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 선배기자들은 자신이 써온 기사들을 단체대화방에 올렸다. 대학면, 사회면, 학술면, 문화면, 인물면. 지면별로 기사들이 올라왔다. 피드백은 하나씩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먼저 담당기자가 자신의 기사를 낭독하면, 나머지 기자들이 차례대로 수정·보완점을 말하는 식이었다. 받은 피드백은 다음 회의까지 반영해와야 했다. 그러고 나면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대구 신천지 발 코로나19 확산으로 전국이 시끄럽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사들의 주제도 그쪽으로 쏠렸다. '전염병이 창궐한 뒤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그때만 해도 그리 진부하지 않은 주제였다. 당시 국민적 관심사가 모아진 또다른 이슈가 있었는데, N번방 사건이었다. 미성년자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일당이 붙잡혔고, 범국민적 공분이 하늘을 찔렀다. 언론은 연일 일당의 잔혹한 만행을 보도했다. 대학 언론도 이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뤘으며, 서울권 학보사들은 아예 연합해 규탄문을 작성했다. 이날 대화방에 올라온 기사 중에도 N번방을 다룬 기사가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손봐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건 '26만'이라는 숫자였다. N번방에 직접 가담한 남성이 26만 명이라는 근거 없는 루머가 전국에 퍼졌다. 처음 수를 집계한 단체도 '단순 합산할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언론 보도와 유명 연예인 SNS를 통해 전해지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 N번방 가담자의 신상을 터는 자경단도 나타났다. 자경단은 가담자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과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목록에는 사회 곳곳에 녹아들어 평범한 척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도 더러 포함돼 있었다. 위를 종합하면, 엄청난 수(26만 명)의 범죄자가 우리 주변에 숨어있고, 따라서 당장 자신이 알던 남자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듣자 하니 조주빈은 학보사에서 활동했고, 1995년 10월생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식으로 생사람을 잡는 경우는 없겠지만, 세상에 그런 괴상한 연상법을 탑재한 사람이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아무리 사소한 의심이라도 모이면 확신이 된다는 건 경험해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텔레그램을 쓴다는 등의 이유로 N번방 가담자로 몰렸다는 글이 올라왔다. 모두가 용의자였고, 아무도 누명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주변의 의심과 확신이 은연중에 이뤄진다는 점이었다. 대놓고 N번방 가담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기소가 없으니 항소할 기회도 없었다. 오명은 피할 수도, 지울 수도 없었다.


담당기자가 N번방 기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조용하고도 엄숙했다. '절대로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절반쯤 읽었을까, 갑자기 입 안에 고인 침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도 이만큼씩은 고인 채로 살 텐데. 점점 거슬리더니 이내 삼키지 않고는 숨을 못 쉴 지경에 이르렀다. 혀를 굴려 침을 모은 뒤 한 번에 삼켜버렸다. '꿀꺽' 목구멍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올라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고 우렁찬 굉음이었다. 방 안 사람들은 물론 옆방에서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을까. 그랬다면 나도 마녀재판에 넘겨졌을까. 



#3 공모전

얼마 전 국내 모 신문사에서 진행하는 취재공모전에 도전했다. 보름 동안 공들인 작품을 출품한 뒤,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어떤 작품을 냈을지 궁금해 언론고시 준비생들이 모인 카페에 들어갔다. 규모가 워낙 큰 탓에 언론사 관계자도 종종 들여다보곤 하는 커뮤니티였다. 그곳에서 다른 참가자가 올린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올린 글은 모두 공모전에 관한 질문 글이었다. 공고만 잘 읽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인데, 그는 공개적으로 묻는 편한 방식을 택했다. (혹은 정말 이해를 못 했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정말 별로다) 만약 공모전 관계자가 봤다면 충분히 편견이 생길 법한, 처참한 수준의 질문이었다.


문제는 질문에 담긴 내용이었다. 그는 공모전 결과가 나오기 전, 다른 매체에 중복 투고해도 되는지를 물었는데(당연히 안 된다. 공고에도 명시돼 있다) 이때 그가 언급한 신문사가 하필 내 취재 경위서에도 등장하는 신문사였다. 취재 경위서에서 나는 ○○신문 활동 중 알게 된 사실을 작품에 담았다고 밝혔고, 그는 ○○신문에 중복 투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이 질문과 작품을 모두 읽는다면, 나를 질문자로 특정할 가능성이다분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전의 질문들도 내가 덤터기를 써야 했다. 담당 부서에 전화해 전말을 알리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심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발렌시아에서 온 기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