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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n 08. 2022

연을 날려 구름에 닿았다

어른아이들의 연날리기 대소동


나른한 현충일 오후. 전날 비가 내린다고 예고한 탓인지 난지천 공원은 한적했다. 공원변을 따라 난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맑게 갠 하늘을 보고 뒤늦게 나온 연인들과 가족들이 적당한 터를 찾고 있었다.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그들도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공원 중앙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공터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그 안에서 더위를 모르고 뛰놀았다. 널찍한 그늘 아래 이동식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했다. 친구들은 회사와 이직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린 조지 기싱의 소설을 읽었다.


맑은 하늘에는 드문드문 두꺼운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언덕을 타고 바람이 불었지만, 다 비운 페트병을 겨우 넘어트리거나 고작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말 정도로 약했다. 소설은 기대만큼 재밌지 않았다. 어려운 기업 용어들로 가득한 친구들의 대화도 귀에 안 들어왔다. 책을 덮고 주변을 둘러봤다. 현충일을 맞아 공공기관에서 계양한 대형 태극기가 반쯤 펼쳐져 있었다. 언덕 중턱의 발전소는 굴뚝으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길게 드리운 구름 한자락이 햇빛을 막았고, 더 많은 아이들이 마당 안쪽으로 뛰쳐나왔다. 그때 연 날리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높게 날렸나 보려고 실을 쫓아가봤는데, 좀처럼 연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나는 너무 낮은 곳을 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발견한 연은 언덕을 넘어 구름에 닿을 듯 높게 떠 있었다.


"어디? 어디? 우오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친구들도 연의 고도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알던 연날리기가 아니었다. 연은 점처럼 작게 보였고, 구름 속으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연줄을 감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연은 흔들림 없이 제 고도를 유지했다. 문득 연을 날려보고픈 충동이 들었다. 곧장 근처 매점으로 가 팔천 원짜리 연을 샀다. 문제는 우리 중 아무도 연을 날릴 줄 몰랐다는 점이었다. 우리 세대는 연보다는 고무동력기와 글라이더에 친숙했다. 연 날리는 법을 검색하려는데, 친구가 얼레를 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연은 곧장 하늘로 솟구쳤다. 얼레가 빠르게 돌아가며 연줄을 토해냈다. 높이가 족히 5미터는 될 듯했다. 이렇게 간단했나. 우리는 아이들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공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달리기를 멈추자 연은 동력을 잃고 추락했다.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레를 넘기며 이어달려도 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일정 높이에 다다르면 연줄이 느슨해지며 연이 내려앉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내린 결론은 '바람 운'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땅 근처에서는 바람도 잘 안 불뿐더러, 방향도 곧잘 바뀌었다. 낮은 고도를 벗어나면 바람이 일관되게 불었다. 연을 구름으로 날려버린 사람은 얼레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올려놓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잘 날아간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했다. 대형 태극기와 새들을 보며 나름대로 바람 때를 유추해보고, 연줄을 풀거나 당겨야 할 타이밍도 연구했다. 하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뭘 하든 바람이 없으면 말짱꽝이었다. 바람, 바람이 핵심이었다.


일정이 있는 친구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친구와 더 도전해봤지만 진전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자리를 정리하다가도 바람이 불면 연을 들고 뛰쳐나갔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친구에게 말했다. 그도 동의했다. 그는 한강에서 연을 날려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강 주변에 바람이 많이 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난지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쌀쌀한 강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 순간 우리는 성공을 직감했다. 넓은 공터에 도착해 연을 띄웠다. 연줄이 풀리며 얼레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갔다. 연은 순식간에 어두운 밤하늘로 솟아올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로 작아졌다. 연줄을 끝까지 풀었다. 거대한 송전탑을 훌쩍 넘긴 높이에서 연이 멈췄다. 대성공이었다. 연은 구름에 닿았고, 우리는 행복했다.


연을 날릴 때 중요한 건 실력이 아니었다. 바람이었다. 바람만 잘 불어준다면 우리 같은 초보도 수십 미터 상공으로 연을 날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람 잘 날 없는' 곳은 우리 주변에 흔치 않다. 바람이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거나, 아예 불지 않는 곳이 더 많다. 처음 실패를 안긴 난지천 공원처럼 말이다. 그런 곳에서 연을 날리려면 비로소 실력이 중요해진다. 우리야 강바람을 맞으며 연 날리는 게 더 재밌었지만, 연날리기의 진면목은 난지천 공원에서 만난 고수처럼 오랜 노력과 시행착오 끝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목표한 고도에 도달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목표는 언제어디서든 원하는 높이로 연을 올릴 수 있는 실력 갖추는 일이다. 우리는 다음 바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Title Image by Martin_Melicherik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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