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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Sep 02. 2022

블라인드 자기소개서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얼마 전 처음으로 블라인드 자기소개서를 써봤다. 말로만 들어봤지, 이렇게 까다로운 줄 몰랐다. 들어가면 안 되는 항목이 왜 이리 많은지. 성별, 이름, 나이, 학교, 지역 등. 직접적인 언급은 물론, 간접적으로 드러나서도 안 됐다. 가령 지원서에 '총을 잘 쐈다'라고 적으면 블라인드 위반이다. 지원자가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군도 있지 않나요! 해도 안 통한다. 통념에 근거해서만 판단이 내려지는 까닭이다. 블라인드로 지정된 항목은 평소 내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믿어왔던 특성들이었다. 이 모든 걸 지우고, 나에 대해 설명하라니 막막했다. 빈 화면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알맹이만 남은 내 모습은 어떨까. 질문은 총 6개였다. 그중 직무에 관한 질문 3개를 뺀 나머지 '자기소개' 질문에 답해야 했다.


[1]번 질문은 남들보다 뛰어난 자신의 역량을 설명하라는 질문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자기소개서를 써봤기에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학보사에서 대학기자상을 받은 경험을 적으면 됐다. 그런데 상을 받은 기사 내용(대학 민자사업)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검색만 해보면 금방 내 신상이 알아낼 수 있었다. 블라인드의 의미가 '어떤 경로로든 지원자를 알 수 없게 하라'는 건지, '전형 안에서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는 건지 헷갈렸다. 전자라면, 수상 사실과 내용도 블러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내용마저 숨겨야 한다면 더는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후자를 의미한다고 믿고, 경험을 풀어냈다. 고유명사 몇 개만 지우면 됐기에 어렵지 않았다.


[2]번 질문은 (우리) 언론사에 지원한 이유를 묻는 질문이었다. 취재기자를 꿈꾸게 된 배경과 입사 후 포부를 맛 좋게 버무려 답하면 되는 문항이었다. 가장 개인적인 만큼, 가장 어려웠다. 군대에서 글쓰기에 빠지고 늦은 나이에 학보사에 들어가 꿈을 발견한 과정을 그대로 적으면 블라인드 위반이었다. 성별과 나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만 이야기를 끝내야 했다. 나는 학보사에서 했던 공영성에 관한 고민들이 공영방송(이쯤 되면 어딘지 알겠지만, 검색 방지로 적지 않겠다)에서 일하고픈 마음으로 이어졌다고 솔직하게 적었다. 물론 반드시 공영방송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공익을 위한다는 뿌듯함이 지원 동기가 됐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3]번 질문은 난관을 극복한 경험을 묻는 문항이었다. 그 어려움을 유발한 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주변의 눈치도 많이 보고, 사소한 언행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격 탓에 갈등을 유발한 적이 거의 없었다. 굳이 꼽자면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막 부임했을 때 동기 기자들 간 갈등을 중재하지 못한 경험 정도. 엄밀히 따지면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재빨리 수습했다면 더 빨리 해결됐으리라는 점에서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또한 모든 답변에 학보 경험을 쓴다는 게 찜찜했지만, 직무 연관성과 블라인드 기준을 모두 충족할 경험은 그뿐이었다. (조별과제에서 PPT를 너무 못 만들어서 욕먹었던 경험을 쓸 순 없었다)


블라인드 기준에 부합하는지 다시 한번 검토하고, 최종제출 버튼을 눌렀다. 막상 해보니 조금 낯설었을 뿐, 어렵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경험을 감싸고 있는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구체적으로 언급할수록 더 생동감 있고, 성과를 더욱 빛낼 수 있었지만 그게 없더라도 경험의 가치는 퇴색되지 않았다. 도리어 껍데기와 알맹이를 분리하는 과정 끝에 더욱 선명하게 내 강점을 볼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런 발견이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인지도 몰랐다. 지원자로 하여금 겉모습 뒤에 숨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일 말이다. 회사도 그 알맹이를 당당하게 내밀 수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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