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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Aug 11. 2022

울타리를 벗어난 양떼

믿음이 투철했던 아이들의 말로


나는 충남 서산에 있는 비(非)인가 대안학교를 나왔다. 종교적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길러내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대안학교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다닐 땐 중고등학교를 합친 전교생이 300명이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다만 교사 수는 많아서, 교사당 열댓 명의 학생이 배정됐다. 학부모들은 관리가 잘 된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선 그만큼 엄격한 통제에 시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골학교의 강도 높은 단체생활까지 더해지며,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처벌 수위도 높았다. 잘못을 하면 우선 매를 맞았고, 정도가 심하면 징계를 받았다. 징계 내용은 전교생이 드나드는 학생식당 게시판에 공포됐다. 금지 목록은 길었다. 술·담배는 당연히 안 됐고, 이성교제, 교복 줄여입기, 외부 음식물 반입, 몰래 MP3나 전자사전에 영화를 다운 받아오는 일도 금지였다. 학생들은 휴대폰도, 컴퓨터도 쓸 수 없는 산골짜기에서, 오로지 공놀이와 악기연주에만 의지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졸업생 중에 예체능계열이 많다) 


본능과 욕구가 폭발하는 학창시절을 공놀이만 하며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이성교제, 술·담배, 노트북 밀반입 등 크고 작은 범죄(?)가 빈번히 일어났다. 식당 게시판에 징계장 종이 붙일 곳이 없을 때도 있었다. 학생들 입장에서 학교가 산골짜기에 있다는 게 꼭 단점만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숨을 곳은 많았다. 뒷산(삼봉산)은 종주하는데 족히 두 시간은 걸릴 정도로 넓었다. 주변에 논밭이 많아 자전거를 타고 10분만 나가면 발각될 일이 없었다. 친구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정말 다양한 수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또 우리 학년만 해도 이 정도인 걸 보면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 동안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낸 학생들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고분고분한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순수했기 때문일까. 얻어맞고 공개처형 당하는 게 무서워서였을까. 아니다. 그런 걸 모두 뛰어넘는 강력한 통제책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이 항상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종교적인 교리 때문이었다.


술담배가 무서웠다. 그런 걸 하면 금방 해골바가지 몰골이 되고 수렁에서 허우적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에 비하면 당시의 일탈은 축에도 못 끼었지만, 예배 시간마다 한없이 무거운 죄책감에 억눌렸다.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MP3로 애니메이션('Devil May Cry'였다) 본 걸 자백하고 맞은 적도 있다. 다른 아이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졸업할 때쯤, 우리 학년 남자애들은 '할 건 다 해본 애들'과 '두부처럼 순수한 애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전자는 축구공을 중심으로, 후자는 농구공을 중심으로 뭉쳤다. 이렇게 파가 갈린 건 힘과 세력에 따라 뭉치는 청소년들의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농구파 아이들은 믿음이 투철했다. 예배시간마다 맨 앞 줄을 다퉜고, 꼭두새벽에 기도회에 나갔다. 사춘기 욕구를 억누르고 금욕을 실천하려 했다. 축구파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처럼 열정적으로 놀고, 싸우고, 혼났다. 여과 없이 호기심을 분출했고, 행동에 대한 책임을 몸소 배우며 자랐다.


반전은 성인이 되고 일어났다. 동창들 수가 워낙 적은 탓인지, 우리는 사회에 나와서도 곧잘 만났다. 특히 결혼이나 장례 등 경조사가 생기면 연락이 뜸해진 동창들도 모두 나와 근황을 나눴다. 그렇게 일 년에 두어 번씩은 보면서 서로의 성장과정을 확인했다. 그러다 얼마 전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학창시절 믿음이 투철하고 욕구를 잘 절제했던 농구파 아이들은 대부분 애주가 및 흡연자가 돼 있었다. 교회에 안 나간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다시 교회에 나가라고 다그치는 쪽은 축구파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술을 적당히 즐겼고,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학창시절 교사들과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자랐으면' 바랐을 모습이었다. 두 집단의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뒤바뀐 모습을 보며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욕구를 분출해본 아이들만이 커서도 욕구를 잘 절제할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농구파 아이들은 성인이 되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을 게 분명했다. 울타리를 몰랐던 양떼는 경계를 모르고 폭주할 수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역작『데미안』은 '밝은 세상'에서 살던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어두운 세계'를 경험하고 선악이 공존하는 상태(아브락사스)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내가 이해한 작품의 메시지는 이렇다. '인간은 자신의 익숙한 세계(알)를 파괴하며 성장한다' 싱클레어는 어린 나이에 데미안을 만나 자신의 알을 깼다. 축구파 아이들은 학창시절 때 다른 세계를 경험했고, 농구파 아이들은 성인이 된 뒤에야 발을 디뎠다. (늦바람이 들었다고 한다) 시기는 달랐지만, 언제까지나 알 속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지나야 하는 단계라면 더 이른 나이에 지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천 원이라도 용돈을 받고 관리해본 아이들이 경제관념을 빨리 배우듯이, 자유를 다뤄본 아이들이 책임을 이해하고 통제력을 갖출 수 있다고. 물론 술담배가 죽을죄도 아니고, 방황이 꼭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다소 성급한 일반화였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해도 괜찮지 않을까, 한때의 방황을 딛고 건실하게 자라난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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