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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Aug 20. 2024

마음 단련 헬스장

남자답게, 지갑을 여세요


돈 갖고 오실 거잖아요.”


헬스장 트레이너가 저 말을 내뱉었을 때 상담을 받는 게 아닌 삥을 뜯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두 갈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대로 P.T를 그만두겠다고 한 뒤 남은 5회차 수업을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 받던가, 쿨하게 긁어 면도 살리고 마음도 편하게 다니던가. 두 달 넘게 몸에 변화도 없고, 회차당 8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 부담스러워 이제 혼자 다녀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주어진 선택지 중 어느 쪽이든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웃으며 한사코 거절하던 얼굴이 문드러져갔다. 트레이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공세를 이어갔다.     




날이 더워지고 겉옷이 얇아지니 다시 헬스 트레이닝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헬스장을 검색했는데 마침 근처에 새로 생긴 헬스장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들 사이 익숙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헬스장이 없어졌다 생기길 반복하는 곳이었다.


헬스장 안내판에는 기본 12회부터 시작해 P.T 수업 횟수를 늘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횟수를 늘릴수록 회당 수업료가 낮아졌다. 트레이너는 반년은 넘게 배워야 운동 효과가 나타난다며 회원들의 ‘비포·애프터’ 사진을 내밀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횟수를 끊고 싶지 않았다. 잊을 만하던 들려오던 헬스장 폐업 사건이 떠올랐다. 막상 받아보니 수업이 별로일 수 있었다. 그래서 동네 헬스장치곤 비싼 값에 수업을 받아야 했지만, 두 달만 먼저 받아보기로 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인바디’ 점수는 낮아졌다. 두 달 뒤 측정했을 땐 근육량이 처음보다 줄었다. 결과지를 받아 든 트레이너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다 약간 낮아진 체지방률 수치를 발견하곤 안심했다. “어쩐지 훨씬 날씬해보이시더라구요.” 나 같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눈바디’란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수업에 대한 의구심이 쌓여갔다.


“반년만 더하면 딱일 텐데....”


수업을 연장하라는 압박은 횟수가 다섯 번 정도 남았을 때부터 시작됐다. 수업이 모두 끝나면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했지만, 트레이너는 집요했다. 반드시 수업이 끝나기 전에 연장 결제를 받으라는 특명을 받은 듯했다. 요청과 거절이 반복되니 수업을 받는 내내 불편했다. 살갑던 트레이너도 점점 냉담해져갔다. 이렇게 남은 수업을 볼모로 잡아 마음에 부담을 주면서 지갑을 열도록 만드는 게 그들의 전략일 거란 생각이 들자 괘씸했다. 막바지에 이르자 트레이너는 혼자 운동하고 있을 때도 다가와 마음이 바뀌었는지 물었다. 특별히 할인해 줄 테니 200만 원이 넘는 수업료를 한 번에 결제해야 한다고 했다.


생각해볼게요, 한마디면 충분할 줄 알았지만 트레이너는 집요했다. 당장은 돈이 부족하다고 둘러대니 신용카드를 주면 3개월 할부로 결제해주겠다고 했다. 신용카드는 안 쓴다고 하니 주변에서 빌린 다음 갚는 방법도 괜찮다고 제안했다. 팀장에게 겨우 허락을 받은 거라 오늘이 지나면 혜택을 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치사하게 윗사람 핑계를 대는 건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다) 나도 뻔뻔하게 부모님과 상의해보겠다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상적인 대화라면 여기서 끝나야 했지만 미련을 떨치지 못한 트레이너는 기어이 선을 넘었다.

 

“부모님한테 지금 전화해보면 안 될까요?”


자정을 앞둔 시간이었다.




헬스장에 들어설 때마다 주눅부터 드는 건 이 공간에선 ‘남자다움’이 경외시되며 힘에 의해 서열이 나뉘는 까닭일 테다. 헬스장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덕목’은 이런 것이다. 무거운 운동기구를 힘든 기색 없이 훅훅 들어올리는 것,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런닝머신 위를 질주하는 것, 옷을 걷어 터질 듯한 근육을 내보이는 것. 혹은 쿨하게 카드를 건네 거금을 결제하는 것. 헬스장 한가운데서 트레이너의 제안을 거듭 거절하며 든 감정은 짜증도, 귀찮음도 아니었다. 비참함이었다. 남성 호르몬 냄새가 진동하는 이 공간은 ‘남자가 근육도 없는데 돈도 없어서 되겠냐’라고 물으며 한 사람의 자존감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트레이너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어느 날 “헬스장을 옮길 테니 남은 수업 횟수를 차감해달라”고 했다. 남은 5번의 수업료가 아까웠지만,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헬스장이 선납에 집착하는 이유를 안다. 회원들이 운동을 가장 열심히 할 땐 돈을 낸 지 얼마 안 됐을 때라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당 얼마’라는 효용 감각은 떨어지고, 헬스장을 찾지 않게 된다. 그런 회원이 많아지면 헬스장은 붐비지 않고 더 많은 회원을 받을 수 있다. 나도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집착은 트레이너들에 대한 실적 압박과 회원들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지고 만다.


반대로 뭉칫돈을 한 번에 내는 회원들은 큰 리스크를 안게 된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매년 헬스장에서 발생하는 계약 관련 피해구제 신청은 3000건 이상이고, 합산 피해 금액은 40억 원이 넘는다. 피해자가 신고하는 비율은 10%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액이 작아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헬스장 계약 관련 분쟁이 잦아지자, 코네티컷 같은 일부 주들은 총액의 일정 비율 이상을 선납받을 수 없도록 법으로 못 박아 버렸다. 호주에선 최대 1년 치만 선납받을 수 있고, 남은 계약 기간이 3개월보다 적을 때만 계약 연장 관련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양심적으로 운영되는 헬스장이 훨씬 많지만, 어떤 헬스장은 여전히 몸이 아닌 마음을 단련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그게 안 되는 사람도 있다. 헬스장 후기들을 보면 그런 '억울남'들이 결코 적지 않다. 다행히 국내에도 월구독형 헬스장이나 선납 이용료 예치 서비스 등 회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안이 마련되고 있다. 이번 국회에서도 폐업 사실을 일정 기간 전 고지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됐다. 중요한 건 헬스장들의 의지다. 전에도 헬스장 요금과 환불 기준을 사전에 공개하도록 한 제도가 시행됐지만 금방 유명무실해졌다. 이번에는 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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