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포 랩 카드 아줌마

약관이 불완전 판매를 막을 수 있을까

by 현우주


올해 2월쯤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카드를 만들라고 영업하는 전화였는데, 평소라면 관심 없다며 곧장 끊었을 전화지만 그날은 상담원의 한마디가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 고객님의 카드가 새롭게 변경돼서 BC카드는 업무 계약이 종료됐고요, 추가나 갱신이 차후에 종료돼서 변경된 내용을 먼저 보실 수 있도록 카드랑 안내장 같이 보내드리고 있거든요..."


전화를 받자마자 상담원은 대뜸 ○○은행 체크카드가 있는지 묻고는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뭔가를 빠르게 설명했다. 쏜살같이 귀 옆을 스치는 단어 중 건질 수 있었던 건 '변경' '종료'와 같은 단어 뿐이었다. 방금 들은 단어들을 토대로 내용을 유추해보자니,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 카드에는 BC카드 마크가 붙어있었다. 계약이 종료되면 카드를 못 쓴다는 뜻인가. 너무 오래 쓴 카드라 갱신할 때가 됐다는 뜻인가. 그 당시 카드는 두 개밖에 없어서, 하나가 사라지면 타격이 컸다. 일단 알겠다고, 진행해달라고 했다.


상담원은 생년월일과 집주소, 연소득을 확인하곤 발급한 카드를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실제 사용할지는 다음 달에 다시 결정해도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야 신용카드 영업 전화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새로운 체크카드를 발급하는 절차인 줄 알았다.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고막을 때린 속사포에 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동의하냐고 묻는 질문에 네, 네, 몇 번 답하고 나자, 상담원은 일단 힘든 고비는 넘겼다는 듯이 잠깐 뜸을 들이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약관을 읽어내려갔다.


<본 계약 체결의 유지, 관리, 개선 등과 신용정보의 집중 관리 및 활용 등 법령상 ○○할 목적으로 개인 식별 정보나 여신거래 정보, 연체 정보, 소득 정보, 개인신용 평점 등 ○○ 실명조회하고 신용보호 집중기관 국가기관 등에 제공해 드리고요. 수입 조회한 개인정보는 거래 종료일부터 5년까지 제공한 정보는 법령이 정한 기간 동안 ○○ 이용하실 수 있으시고 주민등록번호 등 고유식별 정보 수집 이용 조회 제공에 동의하시나요?>


단어 70개를 20초 만에 뱉었다. 처음에는 녹음된 음성이 빨리감기로 재생된 줄 알았다. 세어보니 초당 8.5 음절 정도로 래퍼 아웃사이더에는 조금 못 미쳤지만, 일반인의 두 배 수준이었다. 몇몇 단어들은 녹음을 열 번씩 돌려들어도 무슨 말인지 짐작이 안 됐다. 랩핑은 계속됐다. 연회비, 알림톡, 원화결제 차단, 후불 교통카드 등등. 방금 무엇을 들은 건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 다음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불리한 항목에 동의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나 동의를 안하겠다고 했다. 노련한 상담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달 우수 고객님이시라서, 향후 우수 고객이 필요할 때 사용하실 수 있도록 단기 카드 대출 이거는 그냥 한도만 부여해드리는 건데 동의하시죠?" 답변을 유도하는 듯한 질문에 팍 짜증이 났다. 휴대전화 너머 감정이 읽혔는지 상담원은 나머지 항목을 미동의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기 전 체크카드를 계속 쓸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유효기간까지만 쓸 수 있다고 답했다. 결과적으로 멍청한 질문이었다. 새로 신용카드를 발급 받은 사람이 체크카드에 대해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카드가 집으로 배송돼고서야 알았다. 상담원은 처음부터 체크카드가 만료된다며 접근했고, 상담 내내 신용카드란 단어를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중간중간 체크카드란 단어를 교묘하게 끼워넣었다. 녹취를 꼼꼼히 읽고나서야 그것이 실적을 쌓는 전략이란 게 보였다.


민원을 넣어 신용카드를 해지하고 연회비를 돌려받았다. 불완전 판매(중요한 정보를 충분히 알리지 않은 상품 판매)가 아니냐고 따졌지만 상담원이 정해진 문구를 모두 말했고, 통화 녹음이 남아있기에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했다. 알아들었든 말든 할 말 다 했으니 괜찮다는 뜻이었다. 카드 아줌마는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법적 분쟁에 대비하면서 고객들이 전화를 끊지 않도록 속사포 랩을 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탓할 건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었으면서 홀린 듯 답을 해댔던 멍청함 뿐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너무 괘씸했다.


신용카드 사태, 저축은행 사태, 홍콩 ELS 사태 등 여러 불완전 판매 사태를 경험해온 한국은 그때마다 불완전 판매를 막을 장치를 겹겹이 만들어왔다. 그런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면 아무것도 것이 아니다'란 경구처럼, 너무 많아지면 본래의 기능을 잃을 수 있다. 금융 상품에 가입할 때 읽어야 하는 방대한 약관이 그 예다. 모래알 같은 글씨가 적힌 수십, 수백 장짜리 약관을 던지고선 '모두 이해했다' 란에 체크하라고 한다. 당연히 이걸 꼼꼼히 읽고 이해할 기인은 없다.


불완전 판매는 어떻게 막아야 하나. 약관을 더 많이 만들면 금융사야 안전하겠지만 소비자보호 효과는 더욱 떨어지게 된다. 그보다는 과도한 실적 압박을 완화하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얼마 전 다른 카드사에서 가맹점주 19만 명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사태가 있었다. 영업점 직원이 카드 영업 실적을 더 빨리 쌓으려고 개인정보를 영업맨들한테 뿌린 게 발단이었다고 한다. 홍콩 ELS 사태 때는 은행 직원들이 고위험 상품을 청력도 안 좋은 90대 노인들한테도 속여 팔면서 피해 규모가 커졌다. 모두 실적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다행히 최근 금융당국이 팔을 걷었다. 금융사들에 판매 실적 압박을 덜도록 성과보수체계를 손질해달라고 주문했고, 금융권도 영업보단 상품 경쟁력으로 무게추를 옮기고 있다.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좋은 상품이 있다면 굳이 야비하게 영업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낸다. 올 여름 한 카드사가 역마진을 감수하며 출시한 카드는 혜택이 좋다는 입소문에 발급량이 폭발하며 출시 3개월 만에 단종된 것처럼 말이다. 나도 최근 취재하다 알게 된 한 카드사 직원으로부터 통신비를 할인 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를 추천 받아 발급했다.


"정말 좋은 카드는 영업하지 않고 숨겨요" 그가 귀띔해준 공공연한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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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경제부 직업 기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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