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의 공상과학

우리에겐 판타지가 아닌 SF가 필요하다

by 현우주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은 공상과학(SF)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탁월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생전 8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집필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 리』, 『80일간의 세계 일주』 등이 있다. 모두 어릴 적 한 번쯤은 읽어봤을 작품들로,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나는 지난해 『지구에서 달까지』를 읽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전쟁이 끝나 대포가 필요 없어지자 남겨진 대포 클럽 회원들은 사람을 달로 쏘아 올리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전국에서 수많은 일꾼이 모여 깊이 300미터, 너비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수직갱을 파고, 무려 6만 8000톤에 달하는 철을 녹여 대포를 주조한다. 우여곡절 끝에 포탄에 탑승할 일행도 정해진다. 운명의 날, 달이 근지점(타원 궤도상 지구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대포가 발사된다. 포탄은 순식간에 플로리다 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진다."



쥘 베른이 소설을 쓸 당시만 해도 로켓은커녕 비행기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무리한 비약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이 인상 깊다. 베른은 지구와 달의 근지점 사이의 거리, 달이 천정(天頂)을 지나는 위도를 이용해 발사 장소와 시간을 계산했다. 발사에 필요한 폭약의 양과 구매 방법, 포탄과 발사대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예산마저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과학적 고증력, 다시 말해 ‘그럴듯하게 쓰는 능력’은 이 소설뿐 아니라 베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다. 쥘 베른이 그저 그런 판타지 작가가 아닌 SF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SF와 판타지를 구분하는 뚜렷한 기준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가능한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을 SF로 정의한다. 몸통 길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거미가 등장하는 영화를 떠올려보자. 이것은 먼 훗날 유전자 기술이 발달한다면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영화는 SF라는 꼬리표를 달아도 좋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행성에서 거대한 거미가 나타날 확률은 제로다. 대부분의 곤충은 온몸 구석구석 방사형으로 연결된 호흡관으로 직접 기체 교환을 하기 때문에 일정 크기 이상으로 커질 수 없다. 공기 순환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금방 질식사해버리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킹콩>를 비롯한 대부분의 괴수 영화도 판타지일 뿐이다.


위의 기준을 적용하면 쥘 베른의 작품은 대부분 SF 범주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하며 실현된 이야기가 많은 까닭이다. 오늘날 사람을 달로 쏘아 보내는 로켓은 본질적으로 베른이 묘사한 포탄의 구조와 같다. 『해저 2만 리』의 잠수함 노틸러스 호도 마찬가지다.




SF와 판타지는 모두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즐거움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SF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상상의 실현을 위한 도전의 발판과 영감이 된다. 실제로 현대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어릴 적 베른의 소설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판타지가 현재의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한다면 SF는 미래지향적이다.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앞날이 암울할수록 SF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이유다. 한국의 첫 SF 소설은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라는 단편으로, 1929년 일제 치하 문화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 출간됐다. 한국전쟁 이후 나라가 경제난으로 허덕일 때도 국내 유수 작가들이 근근이 SF의 계보를 이었다.


SF는 우리 민족의 앞날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났다. 얼마 전 국내에서 SF 열풍이 불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젊은 SF 작가들이 문단을 휩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SF 관련 공모전도 부쩍 늘었고, 아예 SF 작품만을 취급하는 출판사도 생겼다. 문득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SF에 열광하는 건, 그만큼 시대가 암울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제적 궁핍과 공상과학이 무슨 연관이 있겠냐마는 다가올 세상에 본인의 처지를 대입하며 얻는 위안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특히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없는 젊은 세대에게 SF는 최상의 위로로 가닿는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길 원한다. 문제는 SF와 판타지를 구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이미 그 현장을 목도했다. 지난해 정부는 전례 없는 추경을 감행하며 전 국민에게 돈을 뿌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내수진작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 돈은 오롯이 청년들이 되갚아야 할 빚이 됐다. 집값을 잡겠다며 부동산 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집값은 폭증했고, 청년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을 모두 접어야 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대규모 정규직화를 감행했다. 하지만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한숨만 더 짙어졌다.


정부의 선의(善意)를 폄하할 마음은 없다. 다만 정부는 청년들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이 내놓은 정책엔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여운이 없었다. 정부는 SF가 아닌 판타지를 보여주었고, 그건 우리가 바라던 장르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조금 더 멀리 바라볼 줄 아는 정부였으면 한다. 과감한 '청년 투자'로 유럽 최강대국으로 거듭난 독일처럼 다음 세대를 간과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려면 투표권을 가진 우리부터 변해야 할 것이다. 적확한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를 찍어 포퓰리즘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시대의 SF는 우리 모두가 함께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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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경제부 직업 기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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