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을 위해

안락사에 대한 생각

by 현우주


다음 달이면 연명의료결정법, 일명 존엄사법이 시행된 지 3년이 된다. 이 법안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했던 연명의료 행위(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를 중단할 권리를 제공한 법안으로, 고통만 가득한 임종 기간을 줄여 '죽음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작년 8월 공시된 통계에 따르면 총 11만 명이 이 법을 통해 생을 마감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발도 있었지만 존엄사법은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한 듯 보인다. 이를 발판 삼아, 안락사법에 관한 논의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안락사와 존엄사는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 안락사는 '안락한 죽음'을 뜻하는 단어다. 통상 약물 등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안락사를 합법화 한 나라들에서는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이라고 불리는데 일각에서는 동의 살인(Consensual Homicide)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한편 존엄사는 '품위 있는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원하는 때,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락사도 존엄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즉 존엄사는 안락사와 연명의료 중단을 모두 포괄하는 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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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와 연명의료 중단은 모두 임종을 앞둔 환자의 무의미한 고통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같다. 다만 방식의 차이가 있다. 안락사는 무언가를 함(Do)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반면, 연명의료 중단은 무언가를 하지 않음(Do Not)으로써 목적을 이룬다. 둘을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뜻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대게는 안락사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는 마이클 센델 교수가 지적했듯, 모종의 '행위'가 포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리의 관점에서 '방조'는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하다.




이미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일부 주에선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안락사 합법화 움직임이 더욱 탄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존엄사법에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우려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고, 죽은 자를 증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기에 죽음과 관련된 법안은 완전무결해야 한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안락사법을 논하기 전에 현 제도의 문제를 진단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다룬 작년 8월 기사에 따르면, 환자가 직접 의사를 표시해 연명의료를 중단한 경우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환자의 의식이 없어 가족 2명이 환자의 평소 의사를 확인해 준 경우(32.7%)가 가장 많았고, 평소 뜻도 몰라 가족 전원이 합의한 경우(32%)가 뒤를 이었다. 이처럼 가족 구성원의 합의만으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한 조항은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이며 서로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라는 구시대적인 명제를 전제로 한다. 이는 가족의 개념이 해체되는 시대에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상속 다툼과 패륜 범죄가 넘쳐나는 요즘, 위 조항이 부모를 내다 버리는 지게 노릇을 하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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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법은 '호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에게만 적용되는 법인만큼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 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통 없이 보내주는 편이 훨씬 낫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인간은 과학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어제는 치료할 수 없던 병이 오늘 치료되는 기적을 보기도 한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의사 2명이 '임종과정' 즉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고 판정을 내린 뒤 가족에게 생사를 맡기는 건 오만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본인이 원해서 호흡기를 떼는 것까진 말릴 수 없다만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엔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은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안락사에 대한 우려를 두 가지 꼽았다. 첫째, 의료인이 악의를 품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 안락사를 위해 필요한 의사소견서를 파는 암시장이나 불법 안락사를 집행하는 의사, 이를 주선하는 브로커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안락사를 빙자한 타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가난한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가족을 생각해 원치 않는 안락사를 결정하는 경우도 나올 수 있다. 백 교장은 미국의 사례를 들며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는 대부분 부자였다며 이와 같은 우려를 일축했다. 하지만 그건 미국의 얘기일 뿐, 한국에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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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안락사법이 제정된다면 안락사가 경제적 빈곤을 비롯한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뚜렷한 기준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미 드러난 구멍을 메우는 작업도 필수다. 앞서 강조했듯 죽음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존엄한 죽음을 원하지만 어떤 죽음이 존엄한 죽음인지에 대해선 정해진 바가 없다. 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하나씩 지워나갈 뿐이다. 그러니 당장은 죽음이 멀어 보여도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누울 자리를 미리 살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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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경제부 직업 기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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