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 사회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이 행복을 찾아 호주로 떠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는 심층 취재를 바탕으로 호주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재치 있게 그려낸다. 그는 먼 타국에서 모국의 풍경을 관조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집단주의와 불평등이 만연한 한국 사회의 실태를 고발한다. 문화와 문화를 비교하며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간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힘든 경쟁을 하며 사는 청년들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민을 떠날 순 없지만, 지금 걷는 이 길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큰 위로로 다가온다. 그렇게 작가는 또 한 번, 청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십 대 후반의 직장 여성 '계나'는 한국에선 경쟁력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호주 이민을 결심한다. 뚜렷한 계획 없이 호주로 떠난 그녀는 푸드코트 알바부터 레스토랑 웨이트리스까지 다양한 일을 전전하며 낯선 땅에 정착해간다. 범죄에 휘말려 억울하게 돈을 잃기도 하고, 온갖 무시와 차별을 당하지만 기어이 호주 시민권을 따낸다. 그 과정에서 계나는 자신이 한국을 싫어한 이유를 알게 된다. 당장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모두 중요하게 여긴 그녀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었던 것이다.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대학과 취업, 승진과 가정, 양육과 노후로 이어지는 긴 수직선이 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이 수직선 위를 착실히 밟아나가는 삶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글로벌 저성장 시대에서 청년들은 기존의 방법으론 어른들처럼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한 위기의식이 모여 '자기 PR'의 시대가 열렸다. 청년들은 각자 인생의 진로를 설계했고, 주변 시선에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수직선이 평면이 된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척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전후좌우를 둘러보며 남과 자신을 비교했다. 오히려 성공의 길이 다양해질수록 그중 어느 것 하나도 잡지 못한 자신을 향한 실망감은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이라는 선택지는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다. 평면은 공간이 됐다. 이제 돈과 여권만 있으면 위, 아래에 포진한 수많은 평면을 보고 원하는 삶을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됐다.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계나는 말한다. 그녀는 어떤 미래를 두려워한 걸까. 그녀의 친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결혼을 한 뒤로 늘 시어머니 흉만 늘어놓는 은혜,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대면서도 매일 회사로 향하는 미연. 아무리 현재를 희생한들 미래에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이걸 깨달은 계나는 한국을 뜰 수밖에 없었던 거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부터 어른들은 늘 다음 단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매일 피곤한 몰골로 퇴근하는 부모를 보면 인생은 하기 싫은 일의 연속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언제쯤 우린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선언할 수 있을까. 그때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한 만큼 아름다울까. 요즘 들어 여행 에세이가 유독 잘 팔리는 건 계나처럼 이 바닥을 뜨고 싶은 사람이 많아진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간디는 '실수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예전에 어느 스타트업 CEO의 인터뷰를 보고 놀란 적 있다. 한 인터뷰 기사에 부모로부터 수천 만원의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과 실패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이 동시에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댓글창에는 이미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는 댓글들이 가득했다. 요지는 '(당신과는 다르게) 한 번 넘어지면 다시는 못 일어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창업, 프리랜서 등 정부는 수직선 바깥으로의 도전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소위 '빽'이 없는 대다수의 청년에겐 실수할 자유가 없다.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예비 낙하산처럼 무가치한 자유일 뿐이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들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두 종류의 행복이 있다.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다. 모든 행복은 이 둘로 양분된다. 내 입장을 예로 들면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는 건 자산성 행복이다. 글을 쓸 땐 힘들지만, 누군가 읽어주고 공감해줄 때 높은 금리의 행복이 나온다. 만약 브런치 계정을 삭제한다면 모든 자산을 잃은 사람처럼 허탈감을 느낄 것이다. 반면 넷플릭스를 보는 건 현금흐름성 행복이다. 장기적으론 남는 게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소설의 결말에 계나는 현금흐름성 행복이 중요하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노력해도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행복을 적금하는 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일까. '욜로'를 외치는 젊은이들을 마냥 냉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한국에서 현금흐름성 행복을 추구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장강명 작가는 늘 말했다. 너의 실패는 너의 잘못만은 아닐지 모른다고. 『표백』 『열광금지 에바로드』 『한국이 싫어서』는 모두 우리 주변을 둘러싼 현실, 즉 한국 사회를 겨냥하고 있다. 누구를 탓할지도, 어디에 하소연할지도 모르는 청년들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달콤한 위로로 다가온다. 물론 어른들은 여전히 노오오력을 외치고, 그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게으름은 천성이 아니다. 오를만 한 언덕 하나 없는 세상 속 당연한 방어기제다. 거대한 산을 보고 등을 돌린 사람에게 노력도 안 하고 포기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노력이라는 말이 씨알조차 먹히지 않는, 이른바 '헬조선'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청년들은 어떻게 어디로 탈출해야 하는가. 『표백』의 답은 자살이었고,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답은 덕질이었다. 『한국이 싫어서』는 이민을 말한다. 요지는 어디로든 도망쳐야 한다는 거다. 그곳이 타국이든, 가상 세계든, 또다른 지옥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