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의미와 글에 대한 집착
할아버지는 아빠가 열여섯 살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그 유전을 물려받은 아빠는 심장 스탠스 시술을 받고, 매일 아침 심장 약을 챙겨 먹는 중이다. 물론 나도 이 가보를 물려받았다. 몸무게가 90kg에 육박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남들보다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됐다. 아빠와 산책을 나간 날, 갑자기 명치 주위가 뻐근해지며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아빠는 그것이 협심증 초기 증상이라고 했다. 젊을 때부터 그러는 건 비만이 원인일 수 있다며 다이어트를 하라고. 하지만 살을 빼도 유전자에 각인된 저주를 풀 순 없었다. 지독한 저주였다.
협심증은 부정맥으로 이어졌다. 심장은 자주 박자를 놓쳤다. 다행히 노련한 드러머처럼 실수를 만회하곤 했지만 매번 같은 요행을 바랄 순 없었다. 이번 아니면 다음, 아니면 그다음. 언제 가냐의 차이만 있을 뿐 떠나는 모습은 늘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늘 죽음이 배회하고 있었다. 옛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군대가 행진할 때, 노예들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를 외쳤다고 한다. 너희도 언젠간 죽을 테니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반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노예와 거울이 필요 없었다. 불규칙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그러한 알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떠난 뒤에 남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를 위해 울어줄 가족과 친구들, 빈 방을 기웃거릴 우리 강아지, 철 지난 옷과 다 읽지 못한 책들, 차갑게 식은 노트북과 그 안에 든 수많은 사진들. 나만이 없는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면 허무감이 밀려온다. 인생을 가꾸는 건, 곧 허물 집을 청소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은 잠시 동안 이런 공허감을 달래주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자연스레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 고민은 세상에 남는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를 테면 글과 사진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글을 쓰고 사진을 남기는 일을 좋아한다. 단순한 성향 차이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내게는 의미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당장 심장마비로 떠난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로 남을까. 무엇이든 남긴 할까. 디지털 시대에 우리에겐 SNS라는 메모리얼 스톤이 주어졌다. 브런치, 인스타를 통해 존재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내 흔적이 반영구적으로 인터넷을 떠돌고,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아주 의미 없는 죽음이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허무와 염세는 부지런히 글과 사진을 남기며 물리칠 수 있다.
앞으로 기자가 되든 소설가가 되든, 글쟁이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가 남긴 글과 사진들이 퍼즐 조각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내 삶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이해되고 존중받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직은 젊어서 괜찮지만, 벌써부터 심장이 말썽인 걸 보면 아무래도 제 명에 죽긴 글렀다. 내일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오늘에 많은 걸 담고 싶다. 남들의 눈엔 게으르고 철없는 나지만, 그 이면엔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내가 있다. 글을 쓰는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