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에 대한 강박
멀티포텐셜라이트(Multipotentialite). 잠재력이 풍부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을 일컫는 이 말을 처음 접한 건 5년 전, 한창 재능과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을 견딜 수 없었던 당시의 나는, 내가 잘하는 일들을 종종 노트에 적어 내려가곤 했다. 수능을 본지 얼마 안 된 탓에 리스트의 상단은 늘 수학, 물리 등의 과목이 차지했다. 그다음은 운동 신경이었다. 공기 좋고 물도 맑은 시골 대안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공부 대신 공놀이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테니스, 탁구 등등. 웬만한 구기종목에서 초보 소리를 듣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퍼즐도 곧잘 풀었다. 큐브를 종류별로 풀 줄 알았으며, 장기나 체스와 같은 보드게임도 나름 잘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능력이 대부분이었지만 리스트의 두께만큼 자존감도 올랐다. 친구들로부터 못하는 게 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했다.
멀티포텐셜라이트와 엑스퍼트(Expert), 다재다능함과 전문성.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대립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늘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은 여러 능력을 두루두루 섭렵한 한 사람 대신 한 가지 능력에 특화된 두 사람을 채용해 왔다. 대학원도 전공을 더 세분화하는 방향으로 전문성의 범위를 좁혀왔다. 한때 스티브 잡스가 창조와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통섭이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하는 듯했으나 우후죽순 인스턴트 인문학 강의가 만들어질 뿐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문가'들은 더 작은 부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인공지능이 빼앗을 직업' '20년 후 유망한 직종' 등 미래 예측 보고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은, 전문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강박을 방증한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 화학, 천문학, 건축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연구를 한 만능 인재였다. 대표적인 예로 다빈치는 수십 구의 시체를 해부해 해부도를 그렸는데, 이 해부도가 당시 의학자들이 그린 해부도보다도 정교해 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다빈치에게 의학적 지식은 부족했을 지라도 관찰한 바를 화폭에 담아내는 능력은 탁월했다. 이 두 능력이 합쳐져 최상의 결과물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다빈치뿐 아니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천재들은 대부분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한 인재들이었다. 현대인의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 또한 이 같은 융합과 통섭의 산물이다. 오늘날 다재다능한 사람을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건 이러한 이유에서다.
분업을 통해 극한의 효율성을 이룬 현대 사회에서, '르네상스형 인간'에 대한 수요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의 약진 등 산업구조가 변하며 전통적인 노동시장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춰 우리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도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사람에서 다양한 재능을 융합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이 같은 인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시간 전문성 함양을 미덕으로 여겨온 탓에 교육과정의 초점 또한 전문가를 양성하는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과정 속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 전공 하나 제대로 소화하기에도 힘에 부치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았다간 아득히 멀리 뒤처진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진로 탐색은 고사하고, 본 전공의 울타리 밖으로 발도 못 내딛고 졸업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한국에서 르네상스형 인간이 되는 건 특별한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과학의 발전과 인구절벽이 맞물리며 곡선은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그런 와중에 한 우물만 파자는 식의 사고는 위험할 수 있다. 다양한 능력과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로는 다방면으로 도전을 해본 뒤에 정해도 늦지 않다. 잠깐은 뒤쳐졌다는 불안감에 휩싸일지라도 넓게 펼친 뿌리로 자양분을 흡수하며 더 멀리 더 빨리 뻗어나가게 될 테니 말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자 다시 노트를 편다. 멀티포텐셜라이트 혹은 르네상스형 인간. 오늘도 열심히 능력을 갈고닦으며 다채롭게 삶을 꾸며나가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