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의 서사

배려할 수 없다면 침묵을

by 현우주


코로나19 바이러스 3차 대유행 조짐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집중이 안돼 집 주변 카페를 찾았다. 평일 오전이었는데도 카페는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구석에 자릴 잡고 음료를 주문한 뒤 밀린 작업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옆에 앉은 아저씨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기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총이 쏠렸다. 나도 그를 노려봤다. 미안한 기색 없이 주기적으로 기침을 해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에 몸이 달아오르더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이기적일까, 어떻게 다른 사람의 감정에 저렇게 무심할까' 기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속 그를 향한 증오가 불어났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도 같은 마음인 듯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반듯이 세운 가운데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만 이리저리 튕궈댔다. 참다못해 퍽 소리가 나게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끝까지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며칠 전, 하루 확진자가 700명 대를 넘나들던 어느 날이었다. 시험기간인데 공부가 안 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며칠 새 확진자가 폭증한 탓인지 카페는 이전보다 한산했다. 덕분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날도 기침을 해대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나였다. 몇 주 전부터 시작된 잔기침이 또 말썽이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건 아니었다. 잔기침이 시작되자마자 검사를 받은 뒤 음성 판정을 받았다. 이비인후과에서 후두염 판정을 받아 확인사살도 마쳤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기침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비하인드를 알 턱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페에서 잔기침을 하다가 옆에 앉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 전 마음속으로 그렇게 증오하던 사람의 행동을 되풀이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노트북을 살포시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러움에, 나도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저씨도, 나도 민감한 시기에 공공장소에서 잔기침을 했다. 둘 다 배려 없는 행동이었고, 둘 다 눈총을 받을만했다. 하지만 나는 왜 내 과오에만 둔했을까. 감춰진 서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후두염을 앓았고 코로나19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런 내막을 알았다면 누구라도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진실보다도, 내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이기심과 배려 없음이 문제였다. 혼자만의 서사는 본의 아니게 이기적인 언행을 낳게 된다는 점을 배웠다.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눈높이를 맞출 줄 안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아는 걸 내려놓긴 그나마 쉽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할 때다. 타인의 서사를 모르지만 더 알아가고픈 마음에 혹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함부로 넘겨짚을 때. 이때의 말과 행동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만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하나. 개인의 하나. 그리고 비밀의 하나' 공적인 하나는 타인에게 보여주는, 꾸며낸 모습이다. 개인의 하나는 관계를 맺으며 차츰 알아가게 되는 그 사람의 본모습이며, 비밀의 하나는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모습이다. <완벽한 타인>은 이 세 개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공적인 삶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 즉 타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는 상황에서의 말과 행동은 얼마나 큰 갈등과 상처를 낳을 수 있는지 배우들의 입을 빌려 그려낸다. 이러한 영화 속 갈등과 상처는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행동들은 다른 서사를 가진 누군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답답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두고 '암 걸린다'는 표현이 유행한 적 있다. 비슷한 시기 친구는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주변에서 무심코 암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일그러지던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상 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은 대부분 그러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무지가 죄는 아니다. 정말 모르고 그랬다면 분명 억울한 마음도 들 테다. 다만 억울함부터 호소하기 전에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누군가에게는 민감한 문제일 수 있는 일에 대해 함부로 말을 내뱉은 건 아닌지.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지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타인의 상황을 짐작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이렇게 반응하겠지!' 하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한 넘겨짚기는 위험하다. 현재뿐 아니라 과거까지 넘겨짚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맞을 확률은 희박하며 대가는 크다. 따라서 최선이 배려라면, 차선은 침묵이다. 그러나 타인의 온정을 필요로 하는 우리에겐 침묵에도 한계가 있다. 타인의 서사를 모르는 우리는 애초에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의 간극은 대화로 좁힐 수밖에 없다. 어떤 아픔은 가지고 있고, 어떤 부분을 조심해주었으면 하는지 허물없이 이야기할 때 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모든 관계는 그렇게 조심스레 안개를 걷어내며 다가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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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경제부 직업 기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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