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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Feb 12. 2021

연재소설 <산책>3

끝 그리고 시작.

모든 일의 결실이 맺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신입 교육이 끝나고 지점으로 발령을 받은 순간부터 실적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지점장이 나와 흰 도화지 같은 화면을 펼쳐 어제 들어간 계약을 체결한 사람과 금액을 나열했다. 박수를 유도했고 마지막엔 항상 가장 큰 계약을 넣은 사람을 불러내어 선물과 함께 계약 체결을 어떻게 했는지 소감을 들었다. 매일 열리는 시상식이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파이팅~!"

지점장의 말과 함께 모든 시상식은 끝을 맺고 직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전화통화를 시작하고 출력을 하고 일을 시작하기 위해 예열을 달구기 시작했다. 사무실의 온도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제각각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러 온 곳이었다. 물론 보험왕이 꿈이 될 수도 있지만 아마도 보험 계약을 통해 나오는 수수료를 통해 각자의 꿈을 이루러 온 곳이라는 말이 더 알맞을 거다.

"택 씨도 얼른 첫 계약을 해야지~" 팀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탈모가 빨리 온 듯, 머리통의 한가운데만 휑하니 비어있는 독특한 탈모 형태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찰에 가면 불상 뒷면을 채우고 있는 벽화 속 삼지창을 든 아귀 같았다. 탈모의 모양이 그렇다는 것이지 팀장은 하얀 피부 살색과 웃을 때 반달 모양이 되는 처진 눈을 가지고 있었다. 탈모가 외형을 지배하지 않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두상의 가운데가 비어 있는 듯 잘 어울렸다. 심지어 그곳에서 반들반들 빛이 나기도 했다.


프랑스 희곡 "위비 왕"을 준비하면서 내심 마지막 공연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었다. 연출자 K는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조연출을 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배우들은 처음 알았고 이번 작품이 그녀의 입봉작이었다.

배우들은 대학로에서 유명한 연출이 전날 술을 먹어 연습을 빼먹고 늦어도 군소리 하나 하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어느 여자 연출가의 연출 방향에는 시시콜콜 딴지를 걸고 있었다. 배우 중에 유일하게 나만이 그녀의 연출 방향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위비 왕"을 기괴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건 "위비 왕"을 쓴 알프레드쟈리도 의도한 바다. 하지만 기괴함을 표현하는 것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삶 자체에 체화되어 있어야 했다.

극단 생활을 하면서 대화와 갈등 없이 연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지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어찌 보면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녀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초보 연출가였고 나도 내로라하는 학교의 전공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비전공자였다. 우리는 이런 곳에 연습실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신림동 먹자골목 안에 숨어있는 건물 지하에서 연습을 했는데 끝마치고 나오면 보이는 신림동 골목은 이제 시작인 것처럼 분주했다. 우리는 시작하는 세상을 등지고 헤어지는 게 아쉬워 으레 술집에 들려 맥주 한잔을 마시고 헤어졌다. 연출가 K는 술이 들어가도 목소리와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약간은 의기소침해 보이고, 깡 마른 여린 몸과 두꺼운 안경알도 한몫했지만, 가라앉아 차마 입 밖을 나오기 힘들어하는 음성은 다른 배우들에게 믿지 못할 연출로 인식되어 갔지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게 된 까닭을. 아마도 나와 비슷할 것 같다는 추측과 함께.

결국 터질게 터졌다. 배우들의 연출가에 대한 불신은 커져갔고 공연 마지막 날 그녀가 동대문에 사 온 공연의상이 문제였다. 당장 내일모레로 다가온 첫 공연이 설레었는지 연습실 계단을 총총걸음으로 한걸음에 내려온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옷가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발레리나 타이즈가 여러 겹 나왔고 그로테스크 한 의상들이 나왔다. 배우들은 의상이 한두 개씩 나올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담배를 피우러 간다는 이유로 연습실 앞 전봇대 앞에 모였고 화살은 나에게로 향했다.

"형이 발레 콘셉트로 하고 나서 연출이 좋아 죽더니 결국 이렇게 되네, 나참. 나 저거 입고 무대에 못 서요."

주인공 위비 왕을 연기하는 동생은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불만을 쏟아냈다. 다른 배우들도 합세했고 결국 배우들은 공연을 올리지 말자고 연출에게 전했다. 일종의 태업이었다. 배우들과 연출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와 연출 K만이 텅 빈 연습실에 남아 있었다. 검은색 발레 타이즈 몇 개가 연출과 나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택, 이걸 입는 게 그렇게 수치스러울까?? 이건 부조리극이야~!"

연출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두꺼운 안경알 사이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눈물이었고 무기력한 분노의 눈빛이었다. 나의 마지막 공연은 그렇게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고 그녀의 첫 연출은 무산되었다.


"위비 왕" 연습이 한창일 때 강남역에 있는 팀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태양왕"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팀장은 질문에 답변을 달아주는 서비스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기로 유명했다. 나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했다.

" 보험영업을 하고 싶은데요..."

팀장의 성심성의껏 달아준 답변에 마음이 움직인 걸까, 아니면 전화통화 후 사무실이 강남역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일까. 태양이 찌는 듯이 강렬한 여름날의 오후, 연습을 하러 가는 길에 팀장을 만나기 위해 강남역에 하차했다.

"제가 지금 공연 연습 중인데요, 공연이 끝나면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공연을 하는지 혹은 연극배우를 하다가 이 일을 왜 하려 하는지 물어볼 만도 한데 팀장은 일절 나의 사생활을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언제든지 하고 싶을 때 오라며 명함 한 장을 주었다.

미팅룸을 나와 사무실을 가로지어 나오는데 벽면에 가득한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8월 영업 이슈, 이번 달 영업왕, 암보험 등등 그리고 "꿈은 이루어집니다."

꿈이라.. 꿈을 버리고 일을 시작할 곳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의 꿈에 사로잡혀 있기에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오전 미팅이 끝나자마자 일단 어디든 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했다. 행선지는 사무실에서 강남역으로 가는 시간 동안 정하면 그뿐이었다. 나와 질풍노도의 시기를 같이 보낸 절친 P는 강남역 대로변을 거닐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룸살롱에서 일하는 여자 일거라고 추측했다. 당시 P는 회사 업무차 접대를 하느라 유흥문화를 즐길 수밖에 없었는데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은 지하철에서도 통하고 있었다. 지하철 한 칸을 둘러보자 출근시간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시간임에도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을 나와 어딘가로 일하러 가는 영업사원임을 아는 건 나도 그들과 같은 영업일을 하기 때문일 거다. 일의 종류만 다를 뿐 결국 상대로 하여금 계약을 이끌어내는 일은 같기 때문일까. 적어도 내 옆자리에 서 문자를 열심히 하고 있는 갓 대학에 입학한듯한 풋내 나는 어린 친구보다 전쟁터에 나온 듯 결연하게 서류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정장남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 이 일은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직업이야~"

신입 교육을 담당하던 교육파트 관리 사원 P는 연수원에서 교육을 끝내고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는 교육기간 내내 유독 나를 챙겼다. 두꺼운 안경알 때문에 눈빛이 굴절되어 잘 보이지 않았고 억양이 심한 경상도 사투리였지만 쎄 보인다기보다는 부드럽고 귀여운 말투였다. 머리와 옷차림은 항상 단정했고 표정은 항상 진지했다. 그가 가끔 강단에 올라와 보험 설계사 자격증 수업을 할 때는 마치 짐 캐리같이 여기저기 사방을 돌아다니며 열성적으로 임했다.

"택 씨 연극했어? "

아마도 이력서란에 채울 게 없어 억지로 채워 넣은 나의 이력을 보고 물어보는 듯했다.

"대학 때 대학로에서 연극 봤던 기억난다.. 대단하더라고 배우들~배우였던 거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하고 있는 수업이 연극이야.. 너도 배우다.

"얼마 안 했어요 하하 쓸게 없다 보니~~"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연기 같은 거 하하, 나중에 회사에서 사내 동아리 한번 만들자~~ 교육이 연기가 필요해요~안 그럼 다들 지루해서 자거든"

두 살 터울이 었던 교육담당 P는 남들보다 일찍 입사를 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열정적이었고 성실해 보였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매달 매달 실적을 내야 하기 때문에 옆, 뒤를 돌아보다 보면 동력을 잃어버릴 수 있어. 경주마들이 눈가리개를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거야. 그렇게 앞만 보고 일하면 억대 연봉은 시간문제야. 그리고 회사에서 스타가 되지."

스타? 이곳은 신기한 곳이었다. 연기가 필요하고 시상식이 매일 열리고 스타가 될 수 있는 곳.

나에게 스타는 로버트 드니로였다. 16살, 같은 반 동급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밤마다 이를 갈고 주먹을 수시로 힘껏 움켜쥐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때 우연히 본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는 카타르시스를 넘어 충격적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뉴욕의 밤거리를 떠돌아다니는 트래비스에게 완벽히 동화되었다. 그가 거울을 향해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고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모히칸식 머리를 하고 정치인의 선거 유세에 나타나 특유의 웃음을 지을 때, 기괴하게 보일 수 있는 그의 행동은 16살 질풍노도의 소년에겐 히어로 그 자체였다. 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매춘굴에서 선혈이 낭자한 핏빛 엔딩으로 끝나는 것 또한 전형적이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소년은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삶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았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파괴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후로 로버트 드니로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라는 직업을 꿈꾸게 됐다. 예술의 순기능일까. 그사이 복수는 까맣게 잊은 체 영화보기에 매달렸다. 그 즈음부터 매년 2월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도 빼놓지 않고 봤다.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살인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베트남 참전용사 등 인생의 비극을 연기한 배우들이 그날만큼은 배역에서 벗어나 멋들어지게 턱시도를 빼입고 수상자가 나오면 약속이나 한 듯 일어나 박수 치는 모습은 16살 소년에게 멋짐이란 건 이런 거구나를 몸소 보여주는 장이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형성을 파괴하기 위해 몇년동안 몸 담궜던 배우생활은 스타는 커녕 영화의 엔딩타이틀에 이름석자 올리기도 버겁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했던 시간들이었다.

배우는 노력하면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스타는 하늘이 정하는 거라고 어느 술자리에서의 연출가 말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일들은 현재와 항상 교차하고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월세를 내기 위해서, 그리고 떳떳한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어느 가게의 문을 힘껏 열었다. 쑥스러운 감정과 얼굴에 퍼지는 붉은 기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크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보험회사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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