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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Mar 06. 2021

연재소설 <산책>4

거리.

보험회사에 들어오기 전 팀장과의 면담에서 지인에게 영업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물론 포털사이트에 남긴 질문에도 지인 영업이 아닌 다른 영업이 가능한지 물었고 팀장은 '개척 영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자동차 보험 매년 의무적으로 가입하죠? 마찬가지로 화재보험도 곧 의무화가 시작됩니다. 음식점, 노래방, 피시방 등 열심히 발품을 팔면 가게 업주들이 이왕이면 찾아오는 사람한테 가입하지 않겠어요?"

자차가 없었기에 자동차보험을 매년 가입하는지 화재보험이란 게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지인을 상대로 영업하지 않고 불특정 다수로 영업한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린 이유는 가까운 사람에게 무언가 부탁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도 한몫했지만 지난 몇 년간의 대학로 생활로 인해 지인들과의 연락이 끊긴 이유가 컸다.

고교 동창들과 대학교 동기들은 어느덧 사회에 자리를 잡아 하나둘씩 결혼을 했고 어쩌다 만나면 대화의 주제는 결혼, 육아, 부동산 등 현실을 이야기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흔들리는 자신이 싫어 친구들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나간 동기모임에서 동기들은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동종업계나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자리를 옮겨 말을 이어 나갔다. 스무 명 남짓한 동기모임에서 공무원을 준비하는 동기와 나만이 시끌벅적한 술자리를 빠져나와 담배를 나눠 피웠다. 담배연기를 내뿜는 그의 한숨이 유독 힘없이 느껴지는 건 오늘따라 고요한 논현동 먹자골목의 한산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 어렵지 않아?"

대학시절 그와 나는 가끔 눈인사나 하는 사이였다. 그는 나와 다르게 과에서 존재감이 있었고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게 할 만큼 사교적이었다. 아마 우리는 서로 성향이 다르다는 걸 곁눈질로 알 수 있었고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에게 말을 걸었던 건 담배라는 매개체를 떠나 오늘만큼은 나와 비슷한 사람일 것 같은 동질감이 느껴져서 일거다.

"벌써 5년째다~집에서도 눈치 보여서 요즘은 노량진에 있어~너 대학로에 있다고 얘기 들었어"

나도 벌써 5년째다. 아니 5년을 훌쩍 넘겼나. 평소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을 너무 안전지향적으로 사는 거라고 비난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의 연극배우 생활은 나의 무모한 기질을 탓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공무원이나 배우 둘 다 바늘구멍인가 보다 크크 언제 머리도 식힐 겸 공연이나 보러 와라~"

위에서 내려다본 그의 머리통 정수리는 이미 탈모가 시작되고 있었다. 검은 머리털 사이로 흰색 반점의 정수리가 빛나고 있었다. 빽빽한 숲 사이에서 휑하게 비어있는 살색의 정수리는 마치 우리의 현재를 알려 주는 듯 텅 비어있었다. 우리는 다시 시끌벅적한 술자리로 다시 돌아왔고 좀처럼 다른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이름, 연락처를 써내려 가세요~"

교육 담당자에게 받은 리스트 끝에는 삼백 명의 지인을 적어야 하는 공란이 있었다. 삼백 명의 지인을 적으라니.. 무심코 꺼내서 본 핸드폰 연락처에는 오십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막 회사를 퇴직하고 온 것 같은 오십 대의 한 남자는 핸드폰을 열심히 보며 종이를 채워 나갔고 교육 내내 분위기 메이커였던 40대 중반의 아줌마는 이 정도쯤이야 라는 표정으로 신나게 종이에 지인의 이름을 써내려 갔다.

보험영업이 곧 사람 영업임을 감안한다면 인간관계가 좁거나 내향적인 사람은 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은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자신에 대해 묻고 관찰하며 오랜 시간을 숙고해서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판단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현실과 이상은 항상 괴리가 있었고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들은 여지없이 깨지기도 했고 인정하지 않았던 타인의 어떤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순간들도 찾아왔다. 삶에 정답이 없다면 가장 확실한 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이유도 모를 자신감이 마음속에 피어났다. 당신들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험가입을 구걸할 때 보험이 필요한 낯선 사람에게 계약을 이끌어 내겠다고.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단기간에 친밀감을 쌓고 계약을 받는 것만큼 큰 쾌감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못다 이룬 배우라는 꿈과 예술활동의 연장선이었다. 꼭 무대에 올라야 카메라 앞에 서야 연기가 완성되는 건 아니니깐.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서 표정을 보며 연습하는 것은 공연할 때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상점이나 가게에 문을 열고 들어서서 사장에게 존재를 각인시키려면 당당해야 했고 목소리도 자신감이 넘쳐야 했다. 행동에는 절도가 있어야 했고 얼굴에선 절대 창피함이나 민망함이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 이후엔 무엇보다 거리감을 좁혀야 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계약을 받아 내기 위해선 친밀함도 가장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는 것이었다. 혹은 외로운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대학가의 먹자골목, 역세권의 유흥가를 정장 차림을 하고 무작정 쏘다녔다. 지하엔 노래방이 있고 1층에 음식점이 있고 2층에는 비디오방, 3층에는 성인전화방이 있는 건물이 보이면 쾌재를 부르며 건물 계단을 뛰어 오르내렸다. 모든 업종이 화재보험을 필히 가입해야 하는 업종이었고 웬만하면 사장이 업소에 상주하는 업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두운 밤이 되고 나서야 간판에 불이 켜지고 영업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새벽 12시, 오늘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본 건물은 지하철 역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 답지 않게 허름해 보였다. 인근 지역이 재개발 특구로 지정되어 상권이 죽은 탓도 있었지만 건물 자체가 오래되어 보였다. 다행히 지하엔 노래방, 1층엔 음식점, 2층과 3층엔 술집이, 맨 꼭대기층에는 성인전화방이 있었다.

음식점과 노래방 사장들은 화재보험이 이미 가입이 되어 있거나 관심을 보여 왔지만 성인전화방 사장들은 귀찮다는 듯이 쫓아내기 일쑤였다. 꼭대기층에서 차례로 방문하며 내려갈 생각으로 큰 기대 없이 문을 열고 사장을 찾았다. 가게문 바로 옆에 사장으로 보이는 청년이 카운터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험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화재보험이 가입되어 있으세요?"

청년은 나를 힐끔 쳐다보고 갑자기 일어나 말없이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음료수를 들고 나왔다.  

"여기 앉으세요~" 뜻밖의 환대였다.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헤어스타일을 한 청년은 한쪽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있었고 날렵한 청바지는 꽤나 가격이 나가 보였다. 마주 앉아 쳐다본 그의 얼굴은 햇볕을 한 번도 받지 않은 것처럼 뽀얀 피부를 갖고 있었지만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사각턱은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혹시 사장님은 언제 나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청년은 씩 웃더니 음료수를 마시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어려 보여요? 손님들도 다 그렇게 말하던데 내가 동안인가 보다 히히"

성인 전화방의 사장이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전화방의 사장들은 대개 연배가 있어 보였기에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장의 외모에 적잖아 당황했다.

"밖에 춥죠? 몸 좀 녹이고 가요~ 난 게임을 마저 해야 돼서 히히~"

다시 자리를 돌아간 사장은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시간 되면 한 타임 하고 갈래요? 내가 넣어줄게요 히히"

그가 손짓한 곳으로 시선을 이동하자 긴 복도에 부스 형식으로 나눠진 방들이 보였다. 항상 문 앞에서 몇 마디 나누고 나와야 했기 때문에 전화방이라는 곳이 어떻게 생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음료수를 마시며 전화방 곳곳을 살펴보는 와중에 방문을 열고 한 손님이 나갔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성인전화방 운영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색안경 끼고 보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지~ 난 천호동에서 노래방도 하고 호프집도 운영하는데 여기가 현금매출이 쏠쏠하다니깐, 알짜배기예요 히히"

사장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처음 보는 영업직원에게 음료를 내오고 존댓말을 하며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차츰 전화방의 꿉꿉한 공기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사장은 나보다 한 살 위였고 젊었을 적부터 자영업에 뛰어들었고 여러 업종을 전전하다가 최근 몇 년 동안 권리금 장사로 돈을 크게 벌기 시작했다고 했다.

"기택 씨? 여기는 알바 놈 한 명 쓰는데 나랑 교대로 나와요, 나도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뭐 게임이나 하러 나오는 거지"

"젊은 나이에 성공하셨네요~ 부럽습니다."

솔직히 부럽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에 적절하게 호응을 해주며 친밀감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칭찬에 사장은 그동안 심심함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신기할 정도로 기다렸다는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어떤 사람들일 거 같아요? 아까 나가신 분은 근처 소방서 서장님이에요~ 동사무소 계장님도 있고 자영업 하시는 사장님들도 오시고 다들 고단하고 외로울 때 쉬었다 가는 곳이죠~ 히히"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중년의 남자들이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다른 성인 전화방 사장들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전형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외형은 물론이거니와 젠틀한 말투, 웃음소리까지 특이했다.

"어이쿠, 기택 씨 시간이 늦었는데 들어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심지어 귀가시간까지 세심하게 체크해 주는 그는 기가 막히게 내가 지루해질 즈음 이야기를 끝마쳤다.

"어차피 여기도 가입해야 하니 내일 견적 한번 뽑아오세요~"

그 순간 교육담당 P의 경상도 사투리가 스쳐 지나갔다.

'고객의 말에 경청을 하세요, 거기서 정보도 얻고 계약이 나옵니다.'

아, 이제 드디어 첫 계약을 하는구나. 견적을 뽑아 오란 말에 자정을 훌쩍 지난 늦은 시간임에도 피곤이 말끔히 사라지는 듯했다. 사장은 여러 매장을 운영하는 잘 나가는 자영업자였기에 알고 지내면 다른 계약으로도 이어질 거란 기대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개척 영업이라는 걸 시작한 이후로 오늘같이 고객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다. 낯선 타인과 거리감을 좁혔다는 건 개척 영업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부푼 설렘을 갖고 미끄러지듯 건물 계단을 내려오자 역 앞의 거리는 전날 밤 보다 더 쓸쓸했다. 그나마 어둠을 밝혀주던 몇몇 네온사인은 사라지고 이름 모를 행인들의 담뱃불만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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