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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May 11. 2021

연재소설 <산책>5

허락.

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방안으로 내리 쨌다. 이 집에서 수많은 아침을 맞이 했지만 오늘만큼 아침 햇살이 강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해가 중천에 떠서야 숙취에 쩌든 몸을 겨우 깨워 일어날 수 있었다. 분명 같은 방인데 햇살의 온도는 평소보다 적당히 따뜻했고 빛 사이로 떠다니는 먼지들도 아름다워 보였다. 단지 첫 계약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어서 사무실로 출근해서 어젯밤 전화방 사장에게 받은 고객 정보를 입력하고 싶었다. 아침을 사과 반쪽으로 급하게 때우고 계단을 내려오자 아래층 동거남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출근하는 아침이면 밤새 동거녀와 싸우고 부스스한 머리로 인상을 한껏 찌푸린 체 담배를 피우고 있던 동거남도 오늘은 웬일인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강남역에서 하차해서 기다란 지하 도로를 뛰듯이 걸어서 대로변으로 올라왔다. 강남역이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도 뻥 뚫린 도로와 인도일 거다. 지하 출구에서 올라와 대로변을 걸으면 인생의 앞날이 걸림돌 없이 탄탄대로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날이 좋으면 강남대로 끝에 걸친 북악산 능선처럼, 솟아올랐다. 오전 미팅에서 지점장은 오늘도 거품을 물고 상품을 설명했지만 이미 마음은 전화방으로 향해 있었다.


사장은 어제와 다름없이 음료수를 내주며 반갑게 맞이 해주었다.

" 견적 뽑아 오셨죠? 화재보험 그동안 미뤘는데 기택 씨 온 김에 해야겠다~히히"

보험료에 따라 두 가지의 상품을 준비해 갔지만 내심 제일 비싼 상품을 선택하길 바랬다.

" 이 상품도 물론 좋지만 사장님처럼 성공하신 자영업자분들은 아무래도 두 번째 상품처럼 원금을 보장하는 상품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여력도 되시고 필요할 때 목돈도 뽑아 쓰시고요~"

그런 호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월말이 다가오면서 실적을 채우기 위해선 보험료가 높은 상품을 가입시켜야 했고 무엇보다 어젯밤 사장과의 대화에서 그만큼의 재정상황이 되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 음... 이런 작은 매장에..."

설명을 들은 사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독 침울해졌다. 순간 첫 계약에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나 후회가 밀려왔다. 어렵게 찾아온 첫 계약의 기회를 무산시킬까 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고 다른 상품을 설명하려던 찰나,

"뭐 이걸로 하죠~히히, 여기에 사인하면 돼요?"

기우는 잠시였고 사장은 재빠르게 사인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담배를 물었다.

"기택 씨~지금 아르바이트생이 오고 있는데 나랑 어디 좀 갈까요? 괜찮아요?"

계약서를 쳐다보느라 사장의 말을 듣질 못했다. 첫 계약, 그것도 개척 영업으로, 월 보험료 50만 원을 계약하다니.. 머릿속은 실적 계산으로 분주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첫 달을 용케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 네?" 

뒤늦은 대답에 사장이 담배를 종이컵에 담갔다. "지..." 담뱃불이 커피에 닿아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임대사업을 하세요~제 명의로도 몇 개 있고요, 오피스텔 건물이랑 주택도 몇 개 있고 거기도 화재보험 가입해야 하지 않나? "

갑자기 어둡고 칙칙한 전화방의 조명이 샹들리에로 바뀌었고 비웃듯 한 사장의 웃음소리는 경쾌한 노래처럼 들려왔다.


"기택 씨~ 차 조심하세요~"

사장은 인도가 없는 길에서 차가 지날 때마다 손을 가로저으며 매너 있게 행동했다. 그의 행동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개척 영업을 한다고 했을 때 교육매니저 P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보통은 대꾸를 안 해주거나 문전 박대는 당연할 거라고 말이다. 호의를 기대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장의 행동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고마웠다.

서울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오피스텔과 주택을 둘러보며 사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줬다.

"교육자 집안에서 저만 사고뭉치였죠~히히 맨날 싸움박질하고 다니고 형은 전교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거든요. 그러고 돌아다니다 보니 조직에 몸도 담갔고 와이프 만나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경호 일을 좀 했었죠~"

예사롭지 않게 보였던 그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냅다 소매를 걷어 팔뚝까지 내려온 문신을 보여 주었다.

"요즘 이거 다시 지우고 있어요~ 그때는 멋있다고 했는데 이젠 지우고 있으니, 이게 비용도 비용이고 기간도 길고 또 아파요~히"

사나워 보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장이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이프가 임신 중이에요~아들이래요 히히"

"어이쿠~축하드립니다~!"

"아들이랑 나중에 목욕탕도 가야 하는데 지워야죠~"

사장은 나이로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이미 결혼한 지 꽤 된 유부남이었다. 경남 어느 시골에 업무상 내려갔다가 그곳 동네 처녀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져 이른 나이에 청혼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부모들은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농부였고 조직에 몸 담고 있는 그를 건달이라고 부르며 결혼을 반대했다.

사장의 아버지는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형은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였지만 시골의 촌부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조직원들이 떠난 경남 시골마을에 혼자 남은 사장은 온갖 선물을 가져다주며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눈 하나 꿈벅하지 않고 선물을 돌려보냈다. 매일 아침이 되면 문안인사를 드리러 집 앞을 찾아갔지만 문전 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사장도 처녀도 지쳐 가기 시작했다.

햇살이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처녀의 아버지는 동네를 감싸고 있는 산마루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완연한 봄이로세~산마물이나 캐러 가볼까~"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호미자루와 자루를 메고 집을 나섰다. 당연히 사장도 호미 자루 하나를 챙겨서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 젊은 혈기로 무서울 것 없던 사장이었지만 촌부의 빠른 산행을 쫒아 가기 바빴다.

촌부는 힘들어서 숨을 헐떡 거리는 사장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에게 사장은 검은색 정장을 빼입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선량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먹고 사는 건달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평소에 한 번도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는 딸이 갑자기 저런 건달이랑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무언가 약점이 잡혔을 거야.. 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저 착한 애가..'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촌부의 표정이 이내 수심으로 어둡게 변했다.

" 자네 거처는 어디서 묵고 있나?"

"읍내 여관에서 묵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쩌다 한번 말이라도 걸면 사장은 감격에 차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는지 촌부는 조금씩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산에는 그들뿐이었다.

"곰취라고 들아봤나? 이게 그 곰취라는 건 디, 고기에 싸서 먹어도 맛나고~장아찌 해서 묵어도 맛나지~

거 멀뚱히 쳐다만 보지 말고 호미로 어서 파~"

사장은 시키는 대로 호미로 곰취와 당귀 그리고 쑥부쟁이들을 캐서 자루에 넣었다. 어느새 산자락으로 보이는 구름이 다홍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촌부는 읍 조리듯 말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단디 도시로 올라가게~방값도 무시 못할 터인데,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라고 거침없이 살아온 사장에게 어찌 보면 처음 맞는 시련이었을 거다. 같이 산행을 하며 촌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린 줄 알았는데 다시 제자리라는 사실이 산을 내려가는 사장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어 서더니 손을 뻗어 사장의 발걸음을 제지했다. 그리고 코를 킁킁 대며 말했다.

"무슨 냄새 안 나나?"

"네?"

촌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장은 짐짓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향긋한 냄새 말이여~ 잘 맡아봐 봐"

사장은 코로 숨을 흡입하며 후각에 집중했다. 도시의 여자들이 뿌릴법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향기에 취해서 코를 박고 싶을 만큼 향긋한 냄새였지만,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적인, 마치 조금 전까지 캐던 산나물에서 올라오던 자연스러운 향기였다. 아니 산나물에서 느껴지지 않는 매력적이고 강력한 냄새였다.

촌부와 사장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냄새를 따라 사뿐히 한 발자국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그적 우그적 동물의 씹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네 다리가 달린 동물이 고개를 숙여 나뭇잎을 씹고 있었다.

"아버님, 노루 같은데요.. 새끼인가.. 어? 앞니가 있는 거 보니 고라니네요~"

"쉿!"

촌부는 눈을 부릅뜨며 사장에게 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노루보다는 몸집이 작고 두 개의 앞니가 나와 있는 걸로 보아 고라니 같았다. 하긴 시골에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 고라니 아니던가. 인기척이 없어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눈을 감고 코로 냄새를 흡입하고 있었다.  엄해만 보이던 그의 표정이 행복한 꿈을 꾸며 잠을 자는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변해있는 게 아니던가. 그렇게 한동안 네발 달린 동물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아니 냄새를 맡았다는 게 맞겠다.

그리고 해가 어둑어둑해져 산에 어둠이 깔릴 때쯤에서야 둘은 마을로 내려왔다. 사장은 산나물로 가득한 자루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건넸다.

"자네 아까 본 게 뭔지 알아?"

"고라니 아닌가요?"

촌부는 이제 것 보여 준 적 없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향노루야~내 평생 여기 살면서 저 산을 수천번을 넘게 올랐지만 사향노루를 본 게 처음이라네..."

그리고 며칠 후, 사장은 촌부의 말대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 물론 사장의 성미상 혼자가 아니라 처녀를 데리고 말이다. 처녀도 처음으로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사장과 도시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둘의 결혼 스토리는 드라마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며칠 후 둘의 결혼을 승낙했다는 거다.


"기택 씨~오늘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어요~ 어디 가서 한잔 하고 가요~히히"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어줘서 그런 건지, 지난날을 추억하니 감회가 새로운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사장은 약간은 들떠 있었다.

"사모님 임신 중이신 데 빨리 들어가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야 뭐 총각이라 상관없지만.."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녀보니 사장은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나름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같이 술을 먹어도 어느 정도의 거리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급격하게 가까워져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면 더 불편했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장은 이미 계약을 한 고객이기보다 앞으로 더 많은 계약이 나올 이른바 '충성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여러분~'충성고객'을 만들어야 합니다~! 충성고객이란 여러분을 좋아해서 여러분 대신 영업도 해주고 소개도 해줍니다. 특히 충성고객이 법인 사장이던가 사업장이 있는 사장님이라면 여러분이 더 편하시겠죠?"

교육 담당 매니저 P는 손가락을 쩍 벌리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다섯 명~! 그런 충성고객 다섯 명이면 여러분의 영업 인생은 탄탄대로입니다~!"

두꺼운 안경렌즈에 굴절된 P의 작은 눈빛이 떠올랐다.

사장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여러 개의 매장과 오피스텔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에 임대업자였다. 그리고 사장 밑에 일하는 직원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의 형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이기도 했다.

우리는 어느새 서울을 돌고 돌아 강남대로의 중간인 논현동 먹자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사장은 대로변에 보이는 작은 바(BAR)를 가리키며 말했다.

"와이프는 이 시간에 일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히히, 여기 들어갑시다~!"

강남대로변은 이미 막 퇴근한 직장인들과 밤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인파로 복잡했다. 어젯밤에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과 첫 계약을 하고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거리의 사람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오늘만큼은 그들과 한데 어우러져 술에 취해 진탕 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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